차별은 선택이다

차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차별은 선택이다.

by 장하영


차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차별은 선택이다

작년 한 해 우리는 유난히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자주 소환했다. 두 사상가는 흔히 염세와 긍정, 비관과 낙관으로 대비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고통의 연쇄로 보았고, 니체는 그 고통을 회피하지 말고 견디며 살아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대비를 통해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의 얼굴을 설명하려 했다.


서울에 갈 일이 있어 1박 2일을 보내고 내려오는 길, 서울역은 여전히 복합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려한 전광판이 역사를 밝히고, 인근 대기업 아울렛에는 소비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앞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이동과 소비, 속도와 효율이 한 공간에 겹쳐 있었다.

그러나 같은 공간의 다른 면은 전혀 다른 현실을 드러냈다. 양말도 신지 못한 채 바닥에 누워 발을 꼼지락거리는 사람이 있었고, 쉬라고 마련된 평상은 더 이상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노숙자와 취객이 머무는 자리로 굳어져 있었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선택지에서 밀려나며, 결국 이 공간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역사 로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그 넓은 로비에서 두 사람만 존재하는 듯 보였다. 중년의 남성은 쉼 없이 말을 쏟아냈고, 정치 이야기 끝에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그의 말은 주변을 향했지만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반대편의 여성은 남루한 셔츠를 입고 낡은 핫팩을 움켜쥔 채, 보이지 않는 상대와 계속해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누군가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감각에 붙들린 듯 보였다.

그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료와 일행은 각자의 대화 속에 있었고, 혼자 있는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고 전화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이었지만 같은 장면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세계는 로비 한가운데 놓여 있었으나, 그 세계는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그 장면이 불편했던 이유는, 누군가가 그들을 노골적으로 배척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도 소리 내어 차별하지 않았고,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다만 이 공간은, 그들이 더 이상 선택지를 가질 수 없도록 만들어진 구조 위에 놓여 있었다. 화려한 소비와 이동의 중심에서, 쉬어야 할 공간조차 점유당한 채 밀려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 차별은 언제나 노골적인 배제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렇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차등의 결과로 조용히 굳어진다.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동생과 함께 일반실에 앉았다. 평소에는 특실을 이용해 왔다. 좌석 간격과 제공되는 서비스, 분위기까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비용을 지불한 만큼의 차이였고, 제도 안에서는 설명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질문이 시작됐다. 내가 당연하게 여겨온 이 선택과 편의가, 내가 믿어온 가치관과 정말 일치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기차는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지만, 칸마다 조건은 달랐다. 특실과 일반실의 구분처럼 삶에도 여러 층위의 칸이 존재한다. 어떤 차이는 선택의 결과지만, 어떤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동 자체가 어려워지는 구간으로 굳어진다. 그 지점에서 차등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가 된다.

서울역에서 본 노숙자들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들은 사회에서 탈락한 예외적 존재가 아니었다. 차등이 누적되고, 회복의 기회가 사라진 끝에 도달한 한 지점이었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과연 다를까. 겉으로는 제자리에 앉아 있지만, 나 역시 다른 결로 어딘가 아픈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학교 안의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 병원에서의 학제에 따른 위계까지, 산업도시 울산의 일터와 공공기관 곳곳에서 조건의 차이가 곧 존중의 차이로 전이되는 장면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이러한 구조가 완전히 사라질 사회는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결국 질문은 여기로 돌아온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힘을 쓰고 있는가. 주식 시장이 오르고, 숫자가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하며, 온 나라가 들뜬 분위기에 휩싸일 때에도, 그 바깥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서울역의 노숙자처럼, 제도의 가장자리에서 오래 머물러 온 이들이다.

미래 사회에 대한 투자는 거창한 산업이나 기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저소득층과 조손가정,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과 노인에게 쓰이는 예산과 관심 역시 분명한 투자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선택지 하나, 회복의 기회 하나가 결국 사회 전체의 안전망이 된다. 차등은 불가피하더라도, 그 차이가 회복 불가능한 격차로 굳어지지 않게 하는 일은 사회의 몫이다.






차등은 사회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역할과 책임, 조건의 차이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 차이가 반복되고 고착될 때, 누군가는 끝내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이때 문제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어떤 차이를 방치했는가에 대한 사회의 선택이다.


새해를 맞으며 바라는 것은 크지 않다. 조금은 더 느리게, 조금은 더 돌아보는 사회였으면 한다. 차등은 인정하되, 차별은 만들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합의가 지켜지는 사회.

주식이 오를 때만큼, 사람에게도 마음을 쓰는 사회. 그 정도의 따뜻함이라면, 우리는 다음 해를 이야기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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