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동을 느끼며

by 장수연

곧 다섯살이 되는 큰딸 하율이는 이제 말을 제법 잘 한다. 취향도 있고, 자기 주장도 세졌다. 같이 대화 나누는 재미가 쏠쏠해서 좋긴 한데, 점점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이런 것. 아침에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하던 중, 하율이가 양말을 짝짝으로 신은 걸 발견했다. "하율아, 양말 잘못 신었네? 갈아 신어~"했더니 하율이가 그런다. "아니야, 이렇게 신어야 재미있어서 그런 거야." 결국 그렇게 어린이집에 갔다. 어느 날은 팬티 두 장을 겹쳐 입고, 어느 날은 그림책에 나온 옷과 비슷한 스웨터를 일주일 내내 입는다. 핫핑크 티셔츠 위에 초록색 스웨터를 입은 딸을 보며 엄마는 속으로 절규한다. '웬열.... ㅠㅠ'

'이게 재미있어서 그런다'는 딸에게 나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내 마음에는 안 드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손에 들고 있던 모노톤의 원피스로 눈물을 훔치며 돌아설 수밖에. 점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하율이를 보며 뱃속에 있는 둘째의 태동이 새삼스럽다.

출산일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아마도 내 인생에서 다시 없을 '임신'이라는 경험을 마무리하며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가 되짚게 된다. 단연 태동이다. 태동. 뱃속에서 느껴지는 이 이물감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란 정말 어렵다. 뱃속에서 뭔가 꾸물거리는데, 이게 소화가 안 될 때 장이 꾸룩거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 손으로 내 발바닥을 간지르는 것과 남의 손이 내 발바닥을 간지르는 게 다르듯이, 태동은 너무나 명백히 '다른 존재가 나를 건드리는 자극'이다. 보통 타인으로부터 오는 촉각적 자극은 외부에서 비록되기에 피부를 거치게 마련인데, 이 태동이라는 건 내부에서부터 온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내 배를 건드리는 그 느낌이 피부 바깥이 아닌 배 안에서 느껴진달까.

때로는 '꿀렁' 하고 때로는 '퍽' 한다. 욕조에 물 받아 목욕을 하고 있노라면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여 목욕물이 출렁출렁 파도친다. 아이가 끊임없이 '엄마, 나 여기 있어요' 하는 것 같다. 태동을 느낄 때마다 이 아이가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나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지. 네가 내 뱃속에 있을 때조차도, 너와 내가 한 몸이었을 때조차도 넌 나와 '다른 개체'였는데. 넌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적이 없는데, 어쩌자고 난 자꾸 네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답답해 하는 걸까. 태동으로 뱃속 아이의 존재감을 느끼며 생각하곤 한다.

육아 전문가들은 '위험한 것이 아니면 기본적으로 아이의 의사를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라'고 조언한다. 하율이가 양말을 짝짝으로 신거나 팬티를 두 장 입거나 같은 스웨터를 계속 입는 건 위험한 일은 아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반사적으로 "하율아, 그러지 말고..."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며칠 전 친구가 "너 나중에 하율이가 커서 음악 한다고 하면 허락 할거야?"하고 묻기에 "내가 뭐라고 허락을 해. 아이 인생이 내 것은 아니잖아"하고 대답했었다. 실제로 나는 아이의 직업이나 배우자나 진로에 대해 내가 '허락'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 대답에 감탄하는 친구를 보며 '아, 이렇게 열린 생각을 가진 부모라니!'하고 스스로 뿌듯했는데, 20년 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자신은 있으면서 오늘 아침 아이가 고른 옷을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게 나의 현실이다.

그렇게 하율이가 마음대로 안 돼 절로 어금니에 힘이 꽉 들어갈 때, 떠올리는 다큐멘터리 장면 하나가 있다. 한창 프랑스 육아가 열풍일 때 보았던 EBS 다큐멘터리인데, 도입부가 아주 인상적이다. 제작진이 취재를 위해 프랑스의 한 가정을 방문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둔 엄마의 아침 풍경을 보여주는데, 아이는 멋진 금발 머리를 허리까지 길렀고 엄마가 그 머리칼을 곱게 땋아주는 모습이 화면에 비친다. 그리고 흐르는 내레이션. "000은 올 해 6살 된 남자아이입니다." 엥? 머리를 저렇게 길렀는데 남자아이였어? 의아해하는 새, 제작진이 엄마에게 인터뷰를 한다. "왜 000은 머리를 기르는 거죠?" 엄마는 직접 대답하지 않고, 아이에게 질문을 토스한다. "00아, 너 왜 머리를 기르지?" 아이가 대답한다. "발끝까지 머리를 길러보고 싶어서요." 엄마는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으쓱해 보인다. 나는 두 번 놀랐다. 아이에 대한 인터뷰 질문에 아이가 직접 대답할 수 있게 유도하는 모습, 그리고 발끝까지 머리를 길러보겠다는 아이의 결심을 지지하며 아침마다 머리를 땋아주는 엄마의 여유.

'프랑스식 육아' 하면 떠오르는 것들, 특히 수면교육과 관련된 육아법들은 사실 시도할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근로 시간이 터무니없이 긴 한국의 직장인 엄마아빠로서는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체념했었다. 우리나라에서 애를 어떻게 8시에 재우냐며, 프랑스 육아는 프랑스에서나 가능하다고 치부했던 내게 그 다큐멘터리는 충격이었다. 저런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아이의 개성을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는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아이의 행동에 내 마음이 불편할 때, 이것이 정말 아이를 위해서 막으려는 것인지 내 취향과 달라서 싫은 것인지 구분할 줄 아는 성숙함은 대체 어디 가면 살 수 있을까. 방광이 짜르르해지는 강한 태동에 잠 못 드는 밤, 아이의 이 움직임이 마치 '모지리' 엄마를 답답해하며 외치는 말처럼 느껴진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아니었다고, 나는 너와 다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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