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by 장수연

얼마 전 전화를 한통 받았다. 여자는 자신을 영화사 홍보 담당자라고 소개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연출하다 보면 게스트 출연이나 상품 협찬 등등의 일로 홍보 담당자의 전화를 종종 받게 된다. 처음엔 그런 전화인 줄 알았다.

“MBC 라디오 장수연 피디님이시죠?”

“네, 그런데요.”

“혹시 <배철수의 음악캠프> 000 작가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황당해서 머릿속에 ‘뎅~’하는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다른 프로그램 작가 전화번호를 물어보려고, 모르는 PD한테 전화했다고? 그럼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너무나 당당하게 대답한다.

“<PD수첩>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PD수첩>은 1년에 한 차례씩 PD협회에서 발행하는, 이를테면 ‘PD들의 전화번호부’ 같은 책이다)

묘하게 불쾌했다. 아니, 내가 무슨 114야? 뭐 이렇게 당당하게 전화번호를 물어봐? 나도 모르게 비뚤게 말이 나갔다.

“프로그램 담당자 번호가 궁금하시면 MBC 라디오 사무실로 전화하시면 되지 않나요? 그 쪽이 누군지 제가 어떻게 확인하고 다른 사람 전화번호를 알려주나요? 연락처 물어보려고 휴직중인 사람한테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하셨어요?”

그러자 그녀도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제가 PD님이 휴직중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됐어요. 알려주기 싫으시면 안 알려주셔도 돼요.”

그러더니 뚝, 전화를 끊어버렸다. 끓어오르는 분노. 너무 화가 나서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쌍문동 치타여사님 표현대로 단전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 이런 네가지없는 경우가.....!!


그 화가 2박3일 쯤 갔다. 머릿속에서 통화 내용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의 말투가 얼마나 예의 없었는지 끊임없이 곱씹는 스스로를 말릴 수 없었다. ‘문자로 세게 뭐라고 할까? <음악캠프> 작가한테 전화해서 그 여자 연락 왔었는지 물어볼까?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을 사흘 쯤 계속하니까 좀 궁금해졌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화가 가라앉질 않는 걸까. 그 여자 말도 맞다. 내가 휴직 중인 걸 알았을 리 없고, PD수첩 보고 MBC 라디오 PD 중 한 명에게 별 뜻 없이 전화했을 텐데,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왜 끓어오르는 분노 앞에 속수무책인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뭐가 이렇게 못 마땅하지?

- 그 여자가 예의 없게 행동 했잖아.

다른 사람이 예의없게 굴었을 때도 화가 났었나?

- 물론.

회사 선배나 상사가 널 화나게 할 때도 그 화가 3일씩 가고 그랬나?

- 그건 아닌듯.

그 때도 ‘어떻게 하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나?

- 그것도 아니지.

그럼 왜 이번에는 계속 ‘어떻게 해야 화가 가라앉을지’를 생각하고 있지?

-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으니까.


이거였다. 계속 화가 났던 이유는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일 경우에는 푸스스 화가 가라앉게 마련이었다. 비겁한 나의 감정이여.

어떻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 약자에게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성숙한 인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해 없기를. 그 홍보 담당자가 약자라는 뜻은 아니다. 많은 경우 홍보팀과 프로그램 제작진은 공생 관계이다. ‘그녀에게 어떻게 복수할까’를 고민했던 건 내 비루한 인격의 발로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묵상하는 것 중 하나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로마 병사의 조롱에 침묵하는 예수의 겸손이다.


내게도 그런 ‘신의 경지’의 인격을 체험해 볼 기회가 주어졌음을 곧 깨닫게 되었으니, 바로 누구보다 약한 내 아이를 향해서이다. 내 아이에게 나는 절대자이다. 먹을 걸 주고, 옷을 입힌다. 물리력으로 완벽히 제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며, 만화를 볼지 말지 따위의 사소한 것도 내가 허락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식에게 조심스럽다.

언젠가 남편이 딸아이를 씻기면서 머리 감기 싫다고 우는 아이를 억지로 붙잡아 감긴 적이 있었다. 빨리 목욕시키고 싶은 급한 마음에 힘으로 어찌해 본 것이다. 그 날, 딸아이는 목욕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목놓아 울더니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한테 화내지지 마!” 딸이 3살 쯤 됐을 때니까 벌써 2년이 지난 일인데, 남편은 요즘도 그 눈빛이 떠오른다고 한다. 조막만 한 게, 말도 겨우 하는 게, 자신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말라고 분명히 표현했던 순간. 그래서인지 남편은 나보다 훨씬 딸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사람이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인 것 같다. 자동으로 인간이 훌륭해진다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를 얻는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강자인 내가 철저히 약자인 누군가에게 가슴 깊이 우러나는 존중감으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자식이 아니면 내가 누구에게 이런 사랑을 해 보겠는가. 화 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힘으로 누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 딸을 통해 더 나은 인격을 조금이나마 경험히 봤으니,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성숙한 인간이기를, 그리하여 조금 더 괜찮은 사람, 괜찮은 엄마가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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