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모에게나 자기 자식이 ‘머리는 좋은데 친구를 잘못 만난 케이스’ 이듯이, 싸움에서 먼저 때리는 건 늘 ‘저집 애’ 이다. 그리하여 엄마들끼리 모아놓으면, 선제공격을 한 아이는 없다. 대체 그 아이들은 무엇에 대해 정당방위를 한 거냐고, 나도 엄마가 되기 전에는 비아냥거렸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다. 하율이가 놀이터에서 어떤 남자애에게 뺨을 꼬집혔는데, 반격은 커녕 피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그 남자애는 하율이보다 어렸고 덩치도 작았다. 그 녀석이 하율이의 볼을 꼬집자 하율이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보고 있던 남편이 잽싸게 하율이를 안고 나왔다. 우리 애는 순해서 때리지 못하고 맞는 쪽이다.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그렇게 말하는 법이지, 라고 비아냥거려도 어쩔 수 없다. 하율이는 순하고, 그 남자애가 먼저 건드렸다.
그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그냥 그렇게 데리고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 남자애나 그 아이네 엄마에게 사과를 받았어야 한다고 말이다. 남편은 당장 맞지 않고 피하는 게 중요하지 사과 받는 게 뭐 그리 대수냐고 맞섰다. 그러면서 하율이에게 다른 친구가 때릴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디테일한 교육을 시작했다. “일단,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해. 따라해봐. ‘하지 마!’ 옳지. 그리고 자리를 피해. 만약에 계속 때리면, 너도 때려. 아니다, 처음 보는 친구면 때리지 말고 그냥 도망가고, 어린이집 친구면 때려. 앞으로 계속 봐야 하는 친구면, 한 번쯤 세게 나가야 우습게 안 보거든.” 나도 덧붙였다. “하율아, 꼭 사과를 받아야 해. 따라해봐.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그렇지. 그냥 도망가거나 피하지 마. 네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하율이에게 하는 말은, 우리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세상과 사람들에게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아니, 그렇게 했어야 했다는 후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믿는 나의 가치관이자, 내 자식은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이를테면 나는, 그 동안 학교나 직장에서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제대로 짚지 않고 그냥 피했던 일들이 후회스럽다. 부끄러워서,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서, 괜히 문제삼는 것 같아서, 유난떤다는 말 듣기 싫어서, 많은 순간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다른 어떤 이유에 앞서, 내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나를 그렇게 막 대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나는 하율이가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부당한 일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의 용기는 갖춘 사람이기를 바란다. 술자리에서 상사가 던지는 성적인 농담이 불쾌하다면 그 술자리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는 것이 우려스럽더라도 본인의 생각을 솔직히 표현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모난 여자가 정맞는 ‘여혐’의 한국 사회를 살게 될 같은 여자로서, 내 딸은 그런 사람이길 바란다. 하율이에게 ‘사과를 받아야 해’라고 말하면서 나는 이렇게나 거창한 속내를 품고 있었다.
아마 남편도 나처럼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딸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누구의 생각이 맞는지를 여기서 논하고 싶지는 않다. 남편과 그거 따지다가 또 싸울 뻔했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5살 아이에게 ‘이럴 땐 이렇게 하라’고 말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00이랑 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해?”라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궁리하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 태도가 어떠했는지 알게 되고, 영어유치원을 보낼지 일반 유치원을 보낼지 고민하면서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마치 사춘기 같다. 정체성을 정립해 가는 시기.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여러가지 뜻이 있을 테지만, 양육의 과정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점도 이유인 듯하다. 사춘기를 지나야 성인이 되는 법이지 않은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할 때, 그 까맣고 깨끗한 눈빛으로 ‘너는 어떤 사람인가’ 묻는 경우가 많다. 날 때리는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물음은, 이제 와 생각하니 내가 그 어떤 면접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무서운 함정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