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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Sep 07. 2016

우리 부부 이야기 (2)

나홍진 감독과의 우연 

11년 전에 나는 나홍진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1.

나의 ‘절친’인 J양이 당시 어떤 단편영화의 미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감독은 한예종 영상원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했다. J양이 ‘영화에 출연할 엑스트라가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냐’기에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했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종로 어디로 오라고 해서 열심히 찾아갔다. 촬영장에는 어묵과 떡볶이를 파는 트럭 노점이 세팅 되어 있었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 해 ‘오뎅 먹는 여자 뒷모습’을 연기했다. 

그 때 내 앞에서 어묵 파는 아저씨 역할을 하던 엑스트라. 그게 나홍진이었다, 고 J양이 며칠 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남자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생각났다. 사람 좋은 얼굴로 스스럼없이 내게 말 붙이던, 꽤 사교성 좋은 사람이었다는 기억과 함께. 나홍진 감독은 그 단편영화의 감독이 매우 신뢰하던 선배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후배의 촬영 현장에 와서 이것저것 돕고 있었던 것이다.     


2.

그 날 촬영에서 미술 담당이던 J양은 ‘길거리에 휘날리는 신문지’를 세팅해야 했다. 하지만 바닥에 놓아둔 신문지는 자꾸 바람에 날아갔고, J양은 고심 끝에.... 아스팔트 위에 신문지를 붙여버렸다! 이제 신문지는 바람에 휘날리는 대신 바닥에서 파닥거렸다. 나홍진 감독이 J양에게 짜증을 냈다. “간지가 안 나잖아~!” J양은 ‘간지’라는 말을 그 날 처음 들었다. (아, 우리는 그토록 어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나홍진 감독은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소주잔이 소품으로 필요하다고 치자. 테이블 위에 그냥 새 소주잔을 놓으면 간지가 없는 거야. 살짝 물방울이 맺힌 소주잔을 놓으면 간지가 있는 거지. 소주잔에 맺힌 물방울, 그게 간지야.”

11년 전 자신이 썰 풀었던 ‘간지론’에 대해 나홍진 감독이 기억한다면... 어떨까. 조금은 부끄러울까. 아니면 그 때부터 소주잔 하나도 허투루 놓지 않던 자신이 자랑스러울까. 어쨌든 뭐. 지금 당신은 '간지' 좔좔 흐르는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까요.     


3. 

지난 주, J양과 점심을 먹으면 2005년 여름에 있었던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더듬더듬 기억을 완성해 가던 중, 그 촬영장에 내가 어떤 남자와 같이 갔었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당연히 지금의 남편이라고 생각해서 카톡을 보냈다. 

“오빠, 그때 그 촬영 기억나?”

 “아니. 그런 적도 있었나?”

 “....오빠랑 같이 안 갔나?”

 “.......어느 오빠냐? 이쪽 오빠는 아니야”

헉. 생각해 보니 2005년이면 이 오빠 사귀기 전이다. 나는 서둘러 우리 사이에 DMZ처럼 ‘청정 구역’으로 통하는 H 오빠의 이름을 댔다. 

“H 오빠 같아”

남편에게 답이 왔다. 

“순발력 좋네”    


남편은 기억력이 좋고, 나는 순발력이 좋다. 

뭐.... 이런 정도 해프닝이 10년차 커플의 '간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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