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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Sep 07. 2016

선배열전


나는 MBC라는 회사를 참 사랑한다. 입사 전부터 MBC 라디오를 좋아했고, 천운에 가까운 행운으로 이 회사에 입사까지 한 이후로는 더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됐다. 사랑하는 연인의 변심을 보는 것처럼, 지금 MBC를 보는 마음은 참 복잡하다. 그토록 좋아했던 이 일에 의욕이 꺾일 정도로, 그 심란함은 크다. 윤태호 작가의 만화 <미생>에서 오차장이 이런 말을 한다. “난 왜... 일에 의미를 부여했을까... 일일 뿐인데...” 나 역시 그렇다. 너무 마음 다치지 말자, 일일 뿐이다,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회사로부터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기란 내게 참 어렵다.     

오늘은 문득, 내가 MBC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순간, 나로 하여금 이토록 이 조직을 사랑하게 했던 순간에 대해 적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멋진 MBC 라디오의 선배 PD들을 기억에 꾹꾹 남겨두고 싶다.    


1.

어느 해 개편 시즌, 몇몇 프로그램이 사라졌다. 으레 있는 일이었다. 없어진 프로그램의 메인작가와 나, 그리고 어떤 선배, 이렇게 셋이서 술을 마셨다. 꽤 친한 사이였다. 나는 작가에게 물었다. “프로그램 하면서 어떠셨어요?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세요?” 당시 나는 갓 입봉한 상태였다. 잘 하려는 욕심이 가득했었다. 잘 하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고 싶어서 물었던 질문이었다. 작가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선배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너 어제 실수한 거야. 어떤 프로그램이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는 그렇게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프로그램이 폐지됐다고 해서 그게 실패라고 단언할 수 없어.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그 프로그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찬찬히 짚어봐야 하는 거야. 심지어 그 때도, 보는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어.”

나는 그 작가에게 사과했다. 내 가벼운 생각에, 방정맞은 입에, ‘성공’에 대한 천박한 판단력에, 너무 부끄러웠다.     


2.

특별히 바쁜 시기가 있었다. 며칠, 몇 주 째 밤늦게 퇴근했고 아침 일찍 나왔다. 집에 들어가 세수할 때마다 ‘화장을 뭐 하러 지우나, 몇 시간 있다 다시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줄지 않는 일 때문에 그 날도 지쳐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선배가 내게 와서 말했다. “야, 맥주 마시러 나가자.” 선배가 술 마시자고 할 때는 웬만하면 나서는 게 이 바닥의 예의다. (결코 내가 술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나는 하던 일을 접고 선배와 회사를 나왔다. 맥줏집에 들어가 앉자마자 선배가 그랬다. “나 지갑 없어. 니가 사라.” 돈도 없으면서 술 마시자고 한 거냐고 타박하자 그 선배 왈. “너 퇴근하라고 인마. 너 며칠째 밤에 이러고 있잖아.”

일 중독 증세를 보이던 나를 회사에서 끌어내고자, 그 선배는 맥주 한잔 하자고 한 거였다. 그 날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즐겁게 일하라. 꾸준히 공부하라. 나는 지금도 그 두 조언을 종종 떠올린다.    

 

3.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바빴고, 여기저기서 치였고, 의욕만큼 뭐가 안 되어 우울했다. 어느 날 내 책상 위에 CD 한 장이 놓여있었다. 정신과 의사 김현철 선생님이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해 이야기한 걸 녹음한 CD였는데, 우리가 직업을 대할 때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그 프로그램을 연출하던 선배가 방송 중에 내 생각이 났다며, 일부러 그 부분을 CD로 구워준 것이다. 직접 이래라저래라 조언하는 대신, 그 선배는 이런 감동적인 선물을 주었다.    


4.

어떤 연예인에게 크게 실수한 적이 있었다. 연예인에게 일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절차로, 어떤 화법으로 말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었다. 매니저와 상의도 없이, 그리 친분도 없던 연예인에게, 대뜸 말을 꺼낸 것이다. 게다가 “00씨는 *** 하기에 좀 애매하시잖아요”라는 예의 없는 말을, 별 생각 없이 내뱉고 말았다. 그 연예인은 매우 불쾌해 했고, 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당시 같이 일을 하던 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어떡하면 좋겠냐고.

이 일이 있은 후, 선배는 자신이 외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닐 때 나를 데리고 다녔다. 어떻게 말을 꺼내는지, 어떻게 설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거절 당하는지까지, 직접 보고 배우라는 그 선배의 의도를 나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일을 해 왔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큰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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