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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Sep 12. 2016

훈육의 조건


 요즘 제작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다큐멘터리이다. 취재하느라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대체로 한 분야에서 오래 일 해온 어르신들이 많다. 그들이 해온 일에 대해 물어보면 모두들 자부심이 가득 담긴 태도로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유감없이 설명하신다. 최근에 만난 68세 이발사 분도 그랬다. “내가 자존심이 엄청 센 사람이에요. 이발사 경시하는 놈들 때문에 아주 힘들었다고, 내가. 직업에 귀천이 있소? 왜 그렇게 경시를 해?”    

나이 든 사람들의 그저 그런 자기자랑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들의 인생이 만만치 않다. 56년 째 이발 일을 하는 이발사 분은 지금도 출근할 때 자기 앞을 가로지르는 사람이 없는 날을 골라 정성들여 가위를 간다. 강원도 홍천에서 20년 가까이 살며 새들을 위해 새집을 지어주고 있는 목수는 ‘새집은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생명의 끈’이라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18년째 국밥집을 운영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신부님 역시 이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고 있는 내 모습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내레이션을 넣고 음악을 입혀 그럴듯한 모양새로 만들어가는 동안, 편집이 잘 된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들으며 괜히 볼륨을 만지작거린다. 뿌듯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다음으로 넘어간다. 사실 PD들이야말로 제멋에 겨워, 자기만족에 취해 사는 대표적인 직업군일 것이다. 0.1초의 컷을 당길지 밀어낼지, 음악 페이드아웃을 3초에 걸쳐 할지 4초에 걸쳐 할지, 듣는 사람에겐 큰 차이 없을 고민이지만 내 귀에 멋들어지게 만드느라 밤을 샌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됐을 때, 헤드폰을 쓰고 한참 편집을 하던 한 선배가 지나가던 나를 부르더니 옆에 앉아보라고 한 적이 있었다. 내 귀에 헤드폰을 씌우고는 한번 들어보란다. 40초짜리 홍보스팟이었다. 다 듣고 나자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야, 죽이지 않냐?”      

어쩌면 우리 모두 ‘야, 죽이지 않냐?’의 순간이 있기에 버티고 사는지 모른다. 크든 작든, 일에서든 그 외 영역에서든, 내 삶이 그래도 가치 있다고 믿으니까 힘들어도 하루하루 지탱이 된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울분을 토하는 걸 볼 때 자존심이라는 것, 인정 욕구라는 것이 생각보다 우리에게 중요하구나, 생각하곤 한다. 다 큰 어른이 숨기지 못하고 애원할 정도로 간절한 감정인 것이다.    


성공회대 교수였던 전인권 선생님의 책 <남자의 탄생>을 읽었다. ‘마음이 비천한 아이들’이라는 챕터에서 저자는 어린 시절, 지킬 수 없는 생활계획표를 만드는 것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야기 한다. 제시된 목표를 실천하지 못했다는 죄의식, 그것을 실천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발견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팽개치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생기게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와 내 친구들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다. 차라리 비속함을 드러내는 것이 더 솔직한 일이었다. 우리의 심리상태는 마치 감옥 안의 죄수들이 일부러 거친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중략)... 우리들은 정말로 상소리를 즐겨 사용했다. 0새끼, 0새끼, 니기미0, 0팔 등과 같이 성과 관련된 욕도 자주 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더 비속한 말을 잘 쓰는가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욕을 많이 할 때도 있었다. 우리가 그처럼 비속한 말을 쓰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욕을 한다는 것, 더욱 심한 욕을 한다는 것은 똑같은 거짓을 범했던 동지들이 서로의 죄를 확인하고 함께 한탄하는 의미가 있었다.>    

자존심, 자존감, 자부심,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 뭐라고 표현하든 아이들에게도 ‘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느꼈다.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 없을 리 없다.     


애덤 그랜트의 <오리지널스>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 대학살 당시 유대인을 구해준 사람들에 대해 실시한 연구가 있는데, 그들의 부모들은 자녀를 꾸중할 때 충분한 설명을 했다는 것이다. '네가 조금만 더 잘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거야'라는 태도로, 꾸중을 듣는 사람에 대한 존중을 표현했다고 한다. 저자는 칭찬의 방법에 대한 실험도 덧붙여 설명한다. ‘아이들에게 네 유리구슬을 나누어주다니, 아주 착하고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라고 아이의 행동을 칭찬하는 것보다 ‘너는 언제든 남을 돕는 아주 친절한 사람이구나’라고 성품을 칭찬하는 것이 아이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성품에 대한 칭찬을 받으면, 아이들은 그 성품을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내면화하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아니, 한 시간에도 여러 번 아이에게 훈육(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말)을 하게 된다. 내가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을 했던가? ‘네가 만약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라는 믿음을 보여줬던가? 혹시 아이가 스스로를 비천하게 여기게 하지는 않았던가? 오늘 나의 힘든 일상을 버티게 했던 힘, 내 삶과 일에 대한 만족감을 내 아이에게도 느끼게 했던가? 


왜 이런 생각들은 하루가 다 끝난 지금에서야 드는 건지. 혼낼 거 다 혼내고 오늘도 혼자 뒷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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