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나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참 신기했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털어놓은 글일 뿐인데 그 안에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는 점이 말이지요. 청년 정치인으로서 겪은 우여곡절이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동경 납치 사건’이고,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하며 감옥에서 썼던 글이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라니,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역사의 현장에 주인공으로 존재했던 인물들이구나 싶었거든요.
MBC에 입사하고 파업에 참여하는 요즘,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는 누군가’가 어디 별나라에 존재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그게 나와 내 이웃일 수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길리, 100여 가구 남짓한 시골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스무 살 때 대학에 입학해 처음 고향을 떠났지요. 너무너무너무너무 평범하게, 아니, ’평범하다’는 말이 오히려 내 상황을 과장하는 수사가 될 만큼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요즘 <힐빌리의 노래>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책을 읽으며 저는 자주 나와 저자의 자라온 환경을 비교하며 누가 더 상류층인지 가늠해 보곤 합니다.)
어린 시절 줄곧 나를 꿈꾸게 하고 공상하게 했던 건 라디오였습니다. 음악이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뭔가 모르게 우아한 사람들(유희열, 정석원, 신해철, 이승환, 이적, 김진표....!!) 이 살고 있는 라디오, 그 언저리에서 뭐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청소도 좋고 잡일도 좋고 글 쓰는 일, 음악 고르는 일, 그 무엇이 됐든, 라디오 근처에서 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단순하고도 간절한 열망이 저를 이끌었고, 어느새 라디오PD가 되었습니다. MBC 직원이 되어 파업에 참여하고 있는 저는, 그저 라디오 근처에서 돈벌이를 하고 싶던 꼬맹이였을 뿐입니다.
2008년 MBC에 입사하고 몇 번의 파업과 제작거부를 치렀습니다. MB정권 때 종편 출범을 막으려 했던 미디어법 파업, 39일 파업, 김미화 진행자의 하차를 막고자 했던 라디오국의 제작거부, 그리고 2012년의 170일 파업, 2017년 지금 진행되고 있는 파업... 굵직하게 기억나는 것만 이렇습니다. 대학교 때 한번도 완창해본 적 없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를 입사하고 나서 외웠습니다. 제가 대학생일 때는 각 대학 총학생회의 한총련 탈퇴가 큰 이슈였고, 저는 그다지 그런 기사들에 관심을 두지 않던 학생이었거든요.
MBC 파업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생각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고. MBC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파업을 하며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기자, 피디, 아나운서, 엔지니어, 경영직군 직원들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말입니다. 여러분, 40일 넘게 파업을 하고 있는 MBC와 KBS의 노조원들, 이명박근혜 정부 기간을 지나며 꽤나 여러 차례 이런 상황을 맞고 있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이미지를 갖고 계시나요? 혹시 국민학교 때 그렸던 김일성이나 북한 주민들 그림처럼, 나와 전혀 다른 ‘상상 속 인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요? 몇 달 쯤 월급을 받지 못해도 천하무적 버틸 수 있는 부유한 상류층, 힘 있는 권력층과 싸우는 일이 너무 당연한 불사조 민주 투사, 그런 일들 겪고 나면 당연스레 ‘승리의 과실’을 따먹는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특권 계층, 혹시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MBC 내부의 계급 차이, 당연히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게 다수는 아닙니다. 적어도 제 주변에서 저와 밥먹고 술먹고 노닥거리는 동료들은 모두 ‘11월 초까지 파업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대출을 받아야 하나’ 걱정하는 평범한 직장인들입니다. 그래서 MBC 파업 기사에 달리는 일부 댓글들이 참 야속하고 서럽습니다. 왜 진작 싸우지 않았냐, 정권 바뀌니까 목소리 내냐, 파업 끝나면 몇 배로 이익 얻는 것 아니냐, 다 똑같은 사람들이다, 저 안에서 정치인 나오고 그러는 거다....
사십 몇일 째 파업을 하고 두 달째 집에 월급을 가져가지 못하고 있는 MBC와 KBS의 노동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 당신의 택시에 탄 취객입니다. 아마도 그는 동료와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서글픈 분노를 토로하며 소주 한잔을 기울였을 겁니다. 추석 명절에 당신이 만난 조카며느리입니다. 귀경길 고속도로에서 <MBC,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당신 앞에서 달리던 승용차의 운전자입니다. 동네 놀이터에서 요즘 부쩍 낮시간에 자주 마주쳐 ‘백수인가?’싶은 애기아빠일 수도 있습니다. 학창시절 유독 라디오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던 조금은 별난 동창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우리 사회의 시민입니다. 당신의 이웃입니다. 어쩌면, 당신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 나라가 이렇게 굴러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 지난 겨울 촛불을 들었던, 바로 당신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독일 에버트 인권상’에 한국의 천만 촛불시민이 선정됐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역사책에 나오는 사례와 개개인의 인생사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의 개인사 안에 언젠가 현대사 교과서에 실릴 역사의 한 장면이 녹아 있습니다. 라디오가 좋아 MBC에 입사한 저는, 방송이 좋아 방송사 직원이 된 내 동료들은, ‘한국의 공영방송사’, ‘한국 언론사’라는 페이지에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당신 직업에서 갖고 있는 직업윤리, 당신이 당신 일터에서 성실한 딱 그만큼, 나와 내 동료들은 지금 당면한 과제에서 물러서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발, 무관심하지 말아 주세요. 남일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방송국 사람들 파업에 내가 왜 관심 가져야 하냐고 말하지 말아 주세요. 무너진 공영방송, 망가진 언론, 그 부메랑이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우리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원이 연예인 한명 한명의 활동 여부를 감시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국민의 공기인 공영방송사가, 한 시절 정권을 잡았을 뿐인 권력자들의 시종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나요? 여기에 저항하는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일터를 빼앗기는 사태는 있어선 안 되는 일 아닌가요? 동의하신다면, 부디, 지금도 싸우고 있는 한국 양대 공영방송사의 파업에 지지의 목소리를 내 주세요.
오늘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있는 사십 몇일 째의 파업, 이 숨막히는 침묵이 서러운 한 언론노동자의 투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