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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Mar 01. 2018

자기 몫의 육아

베스트 베이비 3월호 <장PD의 엄마를 말하다>

(베스트베이비 3월호에 실린 <장PD의 엄마를 말하다>입니다.

지면 분량 때문에 잡지에는 원글에서 조금 편집되어 실렸습니다)


작년 여름, 남편이 육아휴직을 했다. 지금 우리 집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건 내 몫이고 육아와 살림 등 ‘돌봄노동’은 남편의 주 업무다. 특히 평일에는 남편이 (시어머님의 도움을 받아) 거의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한다. 육아도 비슷하다. 내가 지금 맡고 있는 프로가 심야 음악방송이다 보니 규정된 근무 시간이 오후 3시~밤12시이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새벽 1시, 당연히 아이들은 자고 있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씻고 밥먹고 준비하는 한두 시간, 그게 내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의 전부이다. 나는 자식과 대화다운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바깥일’에 바쁘던 옛 아버지들과 비슷하게 살고 있다.

남편이 휴직을 하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더 아이들과 함께 있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있다가 저녁 내내 할머니와 놀며 엄마의 퇴근을 기다렸을 아이가 안쓰러워, 피곤하지만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같이 병원놀이도 하고 책도 읽어주려 노력했다. 그런데 남편이 휴직을 하고 나니 슬금슬금 마음이 풀어진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집에 머무르는 것에서 묘한 안도감이 들면서, 아이들이 덜 안쓰러워진 것이다. 아빠랑 같이 있었는데 뭘, 아이들 노는 동안 침대에 잠깐 누워 있어도 되지 않을까, 남편한테 등원 맡기고 늦잠 좀 자야지... 전처럼 기를 쓰고 틈만 나면 아이 곁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게 됐다. 안방 침대에 누워 있으면 거실에서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피곤해서 잠을 자야 해. 아빠랑 놀자~”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지만 모른척 눈을 감는다. 아빠 있는데 뭐, 둘 중 한 명이 아이들이랑 있으면 되지, 할머니나 베이비시터도 아니고 아빠잖아... 아이가 서운해하는 게 느껴졌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라는 ‘믿는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다 일이 터졌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정기 상담을 했다. 하율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지 4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상담을 갔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이틀 뒤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어머님만 따로 뵙고 싶다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엘 갔더니 선생님 말씀이.... 하율이가 엄마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부쩍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우리를 사랑해서 잘 돌봐주시는데 엄마는 늘 바빠요” 주말에 엄마랑 뭘 하고 싶은지 얘기 나누는 시간에 하율이가 그러더란다. “어차피 엄마는 바쁘거나 잠 자야 해서 우리랑 놀아줄 수 없어요.” 직장 어린이집이다 보니 선생님은 방송국에서 일하는 학부모들의 근무 현실을 잘 이해하고 계신데, 그래서인지 필요 이상으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어머님이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뵙자고 했어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남편에게 민망할까봐 일부러 따로 불러 조용히 이야기하시는 선생님의 배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창피하고 미안하고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에 울음이 올라오는 걸 간신히 눌렀다. 아마 죽을때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시간, 가장 지우고 싶은 장면으로 기억될 것 같다.

찬찬히 나를 돌아보며 떠오른 질문은 이것이었다. 가정 내에서 분업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한국 사회에서 자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아빠는 돈을 벌고 엄마는 가정을 돌보는’ 형태의 분업에 익숙하다. 그래서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 뒤로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덜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아이와 시간을 보내려는 몸부림을 하지 않게 됐다. ‘임금노동과 돌봄노동의 분담’ 문법에서, 우리 부부는 그저 성역할이 바뀐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무엇을 맡느냐와 상관 없이, 그런 식의 분업 자체에 회의감이 든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맺어야 하는 ‘내 몫’의 관계를 남편이 대신 해 줄 수는 없는 것인데,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나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 대신 다른 일을 선택한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아이가 나를 가리켜 ‘어차피 같이 놀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결과이다.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업무 시간을 조절해서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하율이의 하원을 내가 맡으려 한다. 집까지 걸어가는 15분 여의 시간 동안 하율이와 맞잡은 손에서 내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내 인생에서 하율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시간이기도 할 테다.

얼마 전 하율이가 입학할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에 갔을 때, 앞에 서서 진행하시던 선생님은 강당에 모인 부모들에게 시종일관 “어머님들~”이라고 불렀다. 둘러보니 스무 명 남짓한 학부모 중 아빠는 셋이었다. 정현백 여성부장관이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을 방문했다는 기사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한기연 이동석 대표회장은 여가부가 한국 사회 어머니 역할을 잘해 달라고 말했다.’ 어머니의 역할이란, 심지어 ‘한국 사회의 어머니 역할’이란 뭘까. 왜 우리는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는 건 당연히 엄마들이라고 생각할까. 육아와 살림 같은 돌봄노동이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논쟁하여 그 생각을 바꿀 자신은 없지만, 이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기 몫의 육아’를 하지 않은 대가는 정말로 아프다고. 내가 겪어봐서 안다. “어차피 엄마는 바쁜 사람이야”라고 아이가 나에 대해 체념할 때,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은 슬픔 뿐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이와 멀어질지 모른다는 공포, 내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와 자책, 내게 이토록 많은 양의 노동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근로 환경에 대한 분노, 그 모든것이었다.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나는 쉬지도 못해?’ 하는 억울함이 없지 않았으나, 내가 억울함을 표해야 할 대상이 내 아이가 아니라 좀 더 큰 무언가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시스템, 조직, 사회, 구조라 불리는 그 무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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