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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Mar 21. 2018

모유 수유에 대하여

웹진 <아이즈> 기고문

웹진 <아이즈>에 모유 수유에 관한 글을 기고했습니다.

전문을 공유합니다^^

http://m.ize.co.kr/view.html?no=2018031822177227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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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국 교수의 책 <행복의 기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일에 행복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일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어떤 일(먹기, 자기, 섹스하기,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갖가지 매력을 연마하기 등등)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유전자가 애용하는 장려책, 그게 바로 '행복감'이라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내가 느끼던 감정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더듬어볼수록 나는 서은국 교수의 저 설명이 떠오른다.


분만이 끝나고 의사가 건네주는 신생아를 두 손에 받아들 때만 해도 낯설고 어색한 마음이 우세했는데, 아이의 입을 벌려 내 젖꼭지를 물리는 순간 ‘난 엄마, 넌 자식!’하는 강렬한 선언이 전신을 덮었다. 모유 수유는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식을 위해 이 일을 하도록 유인해야 하니, 유전자가 여기에 얼마나 강렬한 행복감을 세팅해 두었겠는가. 이삼십 년 동안 꽁꽁 여며 온 은밀한 부위를 서슴없이 풀어내는 스스로를, 젖몸살로 끙끙 앓으면서도 ‘젖이 돌게’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마사지를 참아내는 고행을, 아이의 빠는 힘에 젖꼭지가 쓸려 피가 맺히면서도, 젖에 온 영양분을 빼앗기느라 머리칼과 피부가 푸석푸석해지면서도 아이가 젖 빠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이 불가해한 행복감을 설명할 논리란 없다. 태곳적부터 이어 온 유전자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라니 겨우 납득하는 것이다. 내 몸이 이렇게 설계돼 있다는데 무슨 사족이 필요하겠는가.


모유수유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 경이롭다. 처음엔 젖이 부족해 아이가 짜증을 내기도 하고 반대로 젖이 도는 속도대로 아이가 빨지 못해 유방에 울혈이 맺히기도 하는데, 점차 아이가 빠는 양에 따라 젖이 늘거나 줄어 서로 ‘적절한 합’을 맞춰간다. 젖이 부족할 때의 해결법은 아이에게 많이 빨리는 것, 차오른 젖을 충분히 빼지 않고 남겨둔 채로 수유를 끝내면 점차 젖 양이 줄어드는 것, 이런 ‘수유 룰’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와 내가 완벽한 한 팀의 복식조처럼 합일을 이루어 안정기에 접어들 때, ‘엄마 인증’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1차 시험 패스’를 한 것 같기도 해 뿌듯할뿐더러, ‘엄마 되기’에 약간의 자신감도 붙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존과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명령대로만 살지 않는 거의 유일한 종이라는 게 또 인간의 특징 아니겠는가. 모유수유를 하며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이따금씩 ‘나’라는 객체의 이성이 정신을 차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생각하기도 했다. 나의 첫 아이는 양쪽 집안 모두에서 첫 손주였다. 양가의 어머니들도 나 못지않게 이 신생아를 신기해했는데, 손주를 보러 오셨다가 내 집에서 친정엄마와 시어머님이 만나신 날도 적지 않다. 어느 날, 거실에서 남편과 친정엄마, 시어머님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내가 수유를 한 적이 있다. ‘젖 물리기’가 지상 최대의 업무였던 시기라 별 생각 없이 때가 되어 수유를 했던 것인데, 그날따라 느낌이 참 이상했다. 앞섶을 열고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는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남편, 엄마, 시어머니… 그 광경이 영상처럼 내 뇌리에 맺혔다. 남편도, 엄마도, 시어머니도 내가 가슴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 셋이 함께 내 가슴을 보고 있는 상황은 영 이상했다. 우스운 건 나를 포함한 누구도 그걸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것. 모두들 내 젖가슴은 안중에 없고 오물거리는 아이의 입만 바라보며 “아이고, 잘 먹는다~”, “땀을 뻘벌 흘리면서 잘도 빠네~” 했다. 나라는 존재가, 아니, 내 젖가슴이, ‘공공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여, 다른 많은 양육의 단계가 그렇듯 모유수유도 ‘생존과 번식을 향한 유전자의 명령’과 ‘이를 거부하는 내 자아’가 엎치락 뒤치락 하며 이루어졌다. 아이와 단 둘이 머무르는 손바닥만 한 집이 답답해 어떻게든 나가고 싶다가도, 시어머니께 아이를 맡긴 채 외출한 날이면 밖에서 아이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내 젖가슴은 모유를 분비하며 반응했다. 힘들었고, 행복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즐거웠다. 아이가 내게 온 이후로, 사실은 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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