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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n 15. 2018

‘하필 지금’ 오는 일

MBC 라디오의 2018년 봄 개편은 MBC 노조가 파업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한 이후 처음으로 단행하는 대규모 정기개편이었다. 많은 프로그램들이 변화를 맞았다. 내가 맡은 프로그램도 진행자를 바꾸고 시간대를 옮겨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잘, 정말 잘 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여러모로 그랬다. 오래 고민해서 DJ를 섭외하고 스탭을 꾸렸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부장의 지원은 적극적이었고 작가진과 호흡도 잘 맞았다. DJ는 성품이 좋고 스마트해서 금방 실력이 늘 것 같았고 게스트 섭외도, 코너 구성도 만족스러웠다. 경주용 자동차가 시원하게 시동을 건 느낌, 액셀레이터에 발을 올려두고 언제쯤 힘주어 밟을까 감질나게 기다리는 기분... 오랜만에 일 하는 게 재미있었다. 첫방송 날엔 설레기까지 했다. 세상에, 설렘이라니. 이게 얼마만에 찾아온 감정인지 까마득했다.

내가 암 진단을 받은 건 그 즈음이었다.

MBC 노동조합에 ‘성평등위원회’라는 기구가 만들어질 즈음이기도 했다. 평소 관심갖던 분야여서 간사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마다하지 않았다. 회사 내에 성평등한 업무 환경이랄지 일/가정 양립을 위한 사내 제도 마련이랄지, 이런 어렵고도 재미난 주제를 두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동료들과 머리를 맞대는 일은 참 즐거웠다. 때때로 대화는 우리의 업무(사측과의 협상 전략 세우기?)와 관계 없이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에 대해 늘어놓는 것으로 흘렀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재미있었다. 회사 내 각 부서별로 간사와 위원을 뽑고(라기보단 협박과 읍소로 섭외하고) 언제쯤 다 같이 모여 식사하며 이야기 나누자고 계획을 세웠다. 그 첫 모임을 치르기도 전이었다.

경향신문 임아영 기자, 정치하는 엄마들 장하나 공동대표와 함께 만들던 팟캐스트 <쓰리맘쇼>가 열 번째 회차를 넘어가던 즈음이었고, <베스트 베이비>에 약속한 칼럼 연재를 두 번 남겨둔 때였다. 출판사 두어 곳의 출간 제의와 몇몇 군데의 북토크 의뢰를 받고, 바쁜 스케줄과 바닥난 체력을 가늠하며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럴 때, 그런 기막힌 타이밍에 의사로부터 갑상선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단을 받고나서 수술을 마칠 때까지 진득하게 나를 따라다닌 감정은 ‘짜증’이었다. ‘아, 귀찮게 됐네’ 뭐 이런 느낌? 한참 재미있는데, 이제 막 탄력 붙었는데 웬 암? 웬 수술? 웬 휴가? 왜 하필 지금? 수술하고 일주일만에 출근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이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암 초기여서 한쪽 갑상선만 떼어내면 되었고, 수술 후 사나흘이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했다. 설명하는 간호사도 말만 암수술이지 거의 맹장수술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마침 내가 맡은 프로그램의 DJ가 일본 스케줄이 있어서 딱 일주일 자리를 비울 예정이었다. 어차피 그 때 제작진 모두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나는 그 때로 수수을 잡으면 되겠다 싶었다.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남편의 말에 직관적으로 수긍했다. 후회할 거라는 예감이 강렬했다. 결국 부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남은 휴가를 탈탈 털어 신청했다.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워야 하니 정리할 게 꽤 많았다. 오지랖 넓게 펼쳐놨던 일들을 하나하나 접었다. 출간 제의와 북토크 제안에 죄송하다는 거절 메일을 보내고, 2회분의 칼럼을 한꺼번에 써서 담당기자에게 보냈다. 팟캐스트 마지막 녹음을 했다. 성평등위원회 간사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담당 프로그램 DJ에게 건강 문제로 한 달 쯤 자리를 비울거라고, 그동안 부장님이 대신 연출을 맡아주실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더는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몸이 아프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깨달았다. 유사 죽음 체험 같기도 했다. 하던 일을 하나하나 접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연상케 했다. 산다는 게 뭘까, 죽음은 어떻게 올까 많이 생각했다. 죽음이 꼭 이렇게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창 재미있을 때, 막 뭐 좀 해보려고 할 때, 이제 겨우 할 만 하다 싶을 때... 죽음이 몇 살에 오든, 쉰이든 예순이든 아흔이든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제 막 딸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이제 겨우 손주 봤는데, 이제서야 은퇴하고 하고 싶은 일 좀 해보려는데 죽음이라니... 짧은 시간 살아오며 죽음을 경험한 건 몇 안 되지만, 전부 그랬다. 몇 년만 더 있으면 취직해서 용돈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제 겨우 둘째 걷는데, 아직 재밌을 날 한참 많은데 엄마가 돌아가셨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죽음은 갑작스러웠다. 나는 ‘하필 이 때’ 암 판정을 받은 게 아니었다. 언제 찾아와도 ‘적당할 때 왔네’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도 그럴 것이다. 전혀 적절하지 않은 타이밍에 갑자기 올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같은 때.

남편이 이런 편지를 써주었다.

<인생은 이어지는 것일까? 어제 했던 것들이 잠든 시간 동안 나를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어제 중단했던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떤 근거로 그렇게 내일 다시 일어날 것을 확신하면서 잠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 의심 없이 다시 시작하는 것일까. 방금까지 분명히 손에 쥐고 있었는데 빈 손임을 확인한 지금, 삶은 너무나 당혹스러워.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음을, 혹은 그냥 주어진 것이었음을 잊었던 것 같아>


이번에는 운 좋게도 어젯밤 멈춘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 달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내 자리, 동료들, 프로그램 모두 그대로였다. 건강은 전과 다를바 없고 아이들과 남편도 똑같다. 그러나 다음에도 이렇게 같은 아침을 맞이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어젯밤까지 쥐고 있던 일들이 사라진 아침, 빈손을 내려다보며 삶이 끝났음을, 최소한 달라졌음을 인정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 날이 올지 모른다. 아니, 반드시 올 것이다. 누구에게나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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