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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Jun 27. 2018

결과로서의 현재, 원인으로서의 현재

수술을 위한 긴 휴가에 들어가기 전,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로와 응원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문자나 전화로, 혹은 직접 만나서 손을 잡아 주었다. 가장 많이 들은 위로의 말은 이것이었다. “그동안 너무 열심히 일했나 봐. 무리해서 그런거야. 이 참에 푹 쉬고 와...” 몸이 아픈 사람들은 예민하다. 나도 느닷없는 암 선고에 예민해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당시의 내 예민한 상태, 비뚤어진 마음 때문이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그 말이 참 듣기 싫었다. 그동안 무리했기 때문에 몸이 아프게 된 거라는 말. 


내게 그 말을 했던 지인들도 이 글을 볼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 더 얘기하고 싶다. 나를 위로하고자 했던 그 마음에 참 고마웠다. 다만 그 때의 내가 어떤 말에도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그동안 내가 열심히 살았음을 인정해 주고 격려하려는 의도로 한 말이었음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그 말은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왜 암에 걸렸을까. 뭘 잘못했던 걸까. 너무 무리해서?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해서? 

그렇다면 내가 했던 일들 중 어떤 걸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맡고 있는 프로그램 연출을 좀 살살 했어야 했나? 피곤해도 아이들과 놀아주려고 아침에 억지로 일어난 게 잘못이었을까? 그냥 늦잠을 좀 잤어야 했나? 출근 시간보다 두세 시간 일찍 회사에 와 팟캐스트를 제작한 게 오버였나? 노조 일을 맡은 게 오지랖이었나? 북토크나 강연 같은 외부 일정이 욕심이었나? 내가 안 했어야하는 일이 이 중 무엇이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그 일들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리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 일들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인지, 암에 걸린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은 나를 너무 우울하게 했다. ‘이 중 뭘 포기할테냐’ 묻는 불가능한 선택의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내가 했던 어떤 행동들 때문에 암에 걸린 거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무리했나 봐”라는 말을 들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억울함과 반발심이 뾰족 돋아났다. 


검색창에서 갑상선암에 대해 찾아보면 ‘대부분의 경우 특별한 원인을 모른다’고 나온다. 방사능에 과량 노출된 경우나 유전적 요인이 원인이 된다는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환자가 훨씬 많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담당 의사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같았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은데 다만 한국의 젊은 여성들의 발병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서 역학조사가 필요한 건 분명하다..... 원인을 모른다는 의사의 단언에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무리해서 암에 걸린 게 아니래. 내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래. 왜 이렇게 된 건지 아무도 모른대....


그러나. 무리해서 암에 걸린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암에 걸렸기 때문에 무리하면 안 되는 건 맞다. 조금씩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암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암이 찾아온 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의 방식의 원인이 암인 것이다. 암 수술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고, 운동 하고,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봤자 갑상선암의 원인을 모르듯 재발을 방지할 방법 또한 입증된 게 없긴 하지만, 일반 사람보다 죽음에 좀 더 가까이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대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이유가 분명치 않은 일 투성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수학 성적이 오르지 않아 괴롭던 학창시절, 내게 돌아온 성적표를 그동안 내가 투입한 노력의 ‘결과’ 혹은 ‘대가’라고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던 걸 기억한다. 이제야 알겠다. 그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 성적표를 받은 게 아니라, 내가 수학을 못 하는 머리를 타고났다는 걸 알려주는, 그러니까 앞으로 다른 과목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었다. 가난, 취업 실패, 질병, 관계의 깨짐 등등 여러 불행에 대해 나는 은연중에 그것이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결과라고 한들, 그래서 뭐 어쩌겠는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유용하다. 앞으로 내가 해야할 일, 살아야 할 삶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생산적이다. 자, 이렇게 됐으니, 이런 이유가 생겼으니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아야겠군! 하고 말이다.


원인과 결과가 선명한 세계를 살았던 적이 있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곳이 그동안 살아온 결과라고 생각했던 건 돌아보면 얼마나 교만한 건지. 얼마나 가혹한 사고방식인지. 


얼마 전 방송에서 오은 시인이 <처음의 맛>이라는 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처음의 맛 

         - 임경섭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이 슬퍼한 밤이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

형이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창문이 있는 곳에서

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 

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


시를 낭독한 후 오은 시인은 말했다. 이 시의 앞부분은 인과관계가 분명합니다.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니까 나무가 움직이고, 창이 있으니 어둠이 새어나오죠.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는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기다려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세월호 생각이 났어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일들이 생각났어요. 


아무리 애쓰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인과관계가 자주 어긋나는 인생의 면모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더 너그러워져야겠다고 다짐한다. 너의 지금은 네 과거의 결과라고 말하는 대신, 현재가 원인이 되어 너의 미래가 달라지길 바란다고 말하겠다고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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