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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Aug 02. 2018

결혼이나 죽음이 아니더라도...

- 백수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연애의 끝은 이별 혹은 결혼이다. 결혼한 뒤로도 이별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건 커서 알았다. 사실 좀 가혹하게 표현하자면 연인이란 ‘아직은 헤어지지 않은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TV와 주변 어른들을 통해 ‘결혼지상주의’의 세례를 잔뜩 받은 채 성장했던 나는 어릴 때 모든 연애가 결혼을 위한 과정인 줄 알았다. 궁극의 사랑, 영혼의 반쪽, 내 결혼 대상자를 만나 행복한 과정을 꾸리기 위해 이런저런 연애를 해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결혼에 골인하다’ ‘결혼에 성공하다’라는 관용어구는 결혼에 이르지 못한 연애가 ‘실패’라는 걸 암시한다. 그 암시에 충실히 세뇌당했던 나는 결혼으로 마무리되지 못한 연애, 이별로 끝나는 연애는 ‘궁극의 상대’를 만나기 전에 치르는 시행착오 쯤으로, 완벽한 서사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우여곡절 정도로 생각했다.

그 생각에 처음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스무 살 무렵, 진한 짝사랑을 할 때였다. 너무 좋은 그 오빠, 내 삶의 반쪽인 것만 같은 그 오빠를 상상 속으로 데려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같이 늙어가기를 수없이 반복했는데, 그러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스무 살인 내가 저 오빠랑 결혼하려면 대체 몇 년을 연애해야 하는 거지? 일단 헤어지고 몇 번 쯤 다른 남자들 사귀다가 20대 후반에 다시 만나야 하나? 내가 20-30대를 거치며 만나는 모든 남자들 중에 제일 괜찮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할 상황이 됐을 때 만나고 있는 남자와 결혼하는 거라는, 모두가 아는 상식을 나만 뒤늦게 깨닫고는 멘붕이 왔다. 결혼에 이르지 못하는 연애가 실패한 사랑이라면, 내가 지금 좋아 어쩔줄 몰라하는 이 마음도 실패라 일컬어지는 것인가? 결혼에 이르지 못하는 연애는 정말 실패인가? 만약 지금부터 열 번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마지막 열 번째의 연애만 완벽한 사랑이고 그 전의 아홉 번은 모두 완벽하지 않은 사랑, 모자란 사랑인가? 정말?

그 촌스러운 ‘연애 무지기’를 지나 삶과 관계에 조금씩 경험이 생기면서, 특히 결혼을 하게 되면서, 그런 식의 생각이 얼마나 불행한 사고인지 깨닫는다. 제일 큰 이유는 결혼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결혼이 내 불안함과 외로움, 여러 복잡한 내면의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 줄 마스터키인 줄 알았다. 멘탈이 허약하고 감정 기복이 심한 나는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도 쉬이 외로워했다. 결혼을 하면 결말이 나온 드라마를 볼 때처럼 내 마음도 편안해질 줄 알았다. 8년여의 결혼 생활을 돌아보니 결혼을 통해, 정확히는 남편을 통해 내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우리 둘 모두 힘들어졌다. 결혼은 치트키가 아니었고,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영역의 감정은 기어이 내 몫이었다. 남편은 내가 맺고 있는 여러 모양의 인간관계 중 한 종류일 뿐이다. 결혼을 해도 여전히 타인이다. 비교적 가까운 타인.

얼마 전 <식샤를 합시다3>라는 드라마에서 전 편의 여주인공인 백수지가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많은 팬들이 속상해했다. 나는 제작진이 왜 백수지가 죽었다고 설정했을까 궁금했다. 그냥 헤어졌다고 할 수는 없었을까. 백수지와 헤어지고 이지우와 새로 사랑에 빠지면 구대영과 백수지의 연애는 실패한 사랑이 되는 것일까. 드라마 주인공은 연인이 죽어야만 새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결혼에 이른 연애는 성공한 사랑, 이별을 맞이한 연애는 그 시간이 얼마나 뜨겁고 달콤했든 실패한 사랑, 대다수 시청자들의 인식 속에 알게 모르게 그런 정서가 있음을 꿰뚫어본 제작진이 구대영과 백수지의 사랑을 완벽히 보존하기 위해 예의를 갖춰 주인공들을 보내준 거라고 굳이 해석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식샤님을 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제작진에게 얘기하고 싶다. 결혼으로 끝나지 않은 연애도 충분하 완벽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시청자가 많다고.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 혹은 죽음으로 어쩔수 없이 이별, 주인공에게 이 두 가지 엔딩만 허락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저 사랑이 다해 자연스레 소멸한 연애라해도, 그 이별까지 포함해서 한 사랑의 완벽한 서사가 완성되는 그런 드라마도 보고 싶다고. 동화 속 판타지가 결혼이라면 어른들 세계에서는 아름다운 이별 또한 판타지 아니겠느냐고. 두준이 입대전 마지막 작품이라면 그런 정도의 깊이는 있는 드라마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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