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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Oct 31. 2018

아름다움이 서사를 만나면...

지금의 디제이와 두 번째 만난 날이었나, 아무튼 첫 방송을 하기 전에 몇 권의 책을 선물했었다. 연예인으로 오래 살아 아무래도 일상 경험이 부족할 듯하여, 청취자들의 사연에 코멘트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들로 골랐었다. (첫 만남에서 책을 좋아한다 하여 준비했을 뿐, 나도 연예인에게 책을 선물한 건 처음이었다.) 짤막한 쪽지도 넣었다.
<아름다움이 서사를 만나면 매혹이 된대.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네게 서사가 생기기를, 그래서 더 매혹적인 아티스트가 되기를.>
뭐 이런 내용.

이서희 작가의 <이혼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아름다움이 서사를 만나면 매혹이 된다.” 외모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많은 연예인이 오늘도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각종 채널에서 매력을 어필하는 가운데, 누구는 시선을 끌어당기고 누구는 스르르 잊혀진다. 예쁨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건 ‘서사가 있는 아름다움’이다. (극단적으로 예쁘다면 그 자체가 서사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쿨럭.) 나는 서사를 만들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매체가 라디오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만남, 우정의 구축, 인연이 이어지는 신비, 생방송의 돌발상황, 해프닝, 이 모든 일상의 반복 그리고 시간의 축적. 그리고 청취자들은 이걸 실시간으로 지켜본다. 첫 방송에서 바들바들 떨며 긴장하던 디제이가, 고정게스트와의 첫 만남에서 다소 어색하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해가는지 고스란히 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에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지고 디제이에게는 캐릭터가 부여되며, 팬들에게는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서사다. 짜여진 각본이 없는 서사.

개편 시즌에 가끔 내게도 디제이를 섭외해야 하는 업무가 주어진다. 라디오 진행자를 구하는 일은 마치, 연극배우나 시인 같은 가난한 예술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로포즈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다른 매체들에 비해 출연료는 턱없이 적은데 시간은 많이 뺏는다. 매일같이 꼬박꼬박. 심지어 행사나 예능처럼 몇 마디 얘기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2시간 내내 떠들어야 한다. 효율과 합리(라고 쓰고 ‘단가’라고 읽는다.)의 언어로는 설득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행사 단가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출연료지만 라디오 디제이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라디오부스에 앉아 음악을 나눠듣고 속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들. 이 세상 어딘가에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연예인들 중에도 디제이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가난한 예술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오늘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그런 연예인을 찾아 헤맨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면서도,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도 유심히 들여다 본다. 어디, 디제이를 하고싶어 할 만한 상인가...
“자네 정말 예쁜 외모를 갖고 있구만. 그런데 이런 얘기 들어본 적 있나? 아름다움이 서사를 만나면 매혹이 된다고... 서사를 만드는 데는 라디오가 제격이지. 출연료는 좀 적네만...그 서사라는 게 말이지... 다양한 음악도 듣고, 사람들 사는 얘기도 들어보고... 이런 게 다 자네한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자네 디제이 생각 없나?”
가끔은 나도 내가 잡상인이나 사기꾼 같지만, 딴에는 진심이다. 서사를 만들어주겠다고, 그래서 당신의 팬 뿐 아니라 당신을 모르는 일반 청취자들이 당신의 매력을 볼 수 있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으로 꼬신다. 이 투박한 유혹에 흔들리는 종류의 사람이길 빌며.


그러니 연예인들이여, 라디오 좋아한다고, 언젠가 디제이 해보고 싶다고 함부로 인터뷰하지 마시라.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섭외전화 할 수도 있으니. 그게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닌지, 혹시나 진심이었던 건 아닌지 확인해야만 포기가 되는 순진한 라디오피디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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