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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May 28. 2018

청춘 끝, 휴가도 끝.

청춘은 언제 끝날까. 암 진단을 받던 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 의식된다면 , 건강이 신경쓰여 몸을 사리게 된다면, 그 때가 젊음의 끝 아닐까. 수술 날짜를 잡고 이후 치료 일정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들은 뒤 남편과 나는 점심 먹을 곳을 찾아 세브란스 병원에서 이대 앞까지 걸어 갔다. 결혼 전 여기서 데이트하던 추억을 한담처럼 나누며. 10년 전 우리 같은 청춘남녀들을 헤치고 샤브샤브집에 들어가 앉으니 문득 벽에 붙어있는 생맥주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잔 할까?” 농담을 던졌지만 그다지 당기지는 않았다. 3주 전 조직검사를 한 이후로 담배도 끊은 참이었다. 아마도 이제부터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다. 술도 자제할 확률이 높다. 비교적 완치율이 높아 ‘착한 암’이라 불리는 갑상선암이지만, 재발이나 전이의 위험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흰 거품이 찰랑이는 맥줏잔 사진을 앞에 두고 나는 앞으로 내가 죽을 때까지 건강을 신경쓰며 살아가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죽을까봐. 어린 딸들 남겨두고 죽을까봐 무서워서 술, 담배 끊고, 몸에 좋은 것 챙겨먹으며 살게 될 것이다.

몸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격렬하게 술을 마셔대던 날들이 떠올랐다. 카페인 음료를 마셔가며 밤늦게까지 공부나 일을 하던 날들도. 마음껏 건강을 탕진하며 살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이제 다시는 내게 그런 시간은 오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죽을때까지 두번 다시는 그렇게, 그런 식으로는 살 수 없겠구나. 그 때는 죽음을 의식하려 해 봐야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무리’가 가능했다. 젊다는 건 그런 것 같다. 그러니 내 젊음은 서른여섯 봄에 마무리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청춘이 언제 끝나는 줄 아느냐고 묻는다면 더이상 탕진할 수 없을 때 끝난다고, 죽음이 의식되어 도저히 그럴 수 없을 때가 청춘의 끝이라고 대답하리라.

암 판정을 받은 직후부터 약 한달 사이에 벌어진 내 감정의 변화는 언젠가 꼭 다시 꼼꼼히 곱씹으며 복기해야겠다고 당시에도 생각했었다. 내 반응, 생각의 변화는 스스로 보기에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암 판정을 받은 사람의 내면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의사는 모니터를 통해 내 세포검사 결과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치료가 좀 필요하겠네요. 갑상선 암입니다. 크기는 1센티 정도로 크지 않고요, 수술을 통해 제거하면 됩니다.” 참 좋은 의사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검사 결과를 듣는 긴장되는 순간, 암이라는 사실을 통보하는데 ‘치료가 필요하겠네요’라는 표현을 구사하는 섬세한 의사를 만나는 행운이 내게도 오는구나. 이후 치료를 마치는 순간까지 내내 그런 태도를 보이셔서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의사가 워낙 담담하게 이야기해서인지 암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다지 드라마틱한 감정의 파고를 겪진 않았다. 물론 상대적으로 가벼운 증상이고 간단한 수술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DJ 일본 팬미팅 갈 때 수술하면 되겠구나, 다행이다’였다니.
프로그램 스케줄 상 일주일 넘게 녹음기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라디오는 DJ의 스케줄에 따라 미리 생방/녹음 일정을 짜 둔다.) 처음엔 이 기간에 수술을 하고 바로 업무에 복귀할 생각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물론 남편을 제외한 누구도 내가 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아무도 모르게 이 ‘사태’가 지나갔으면 했다. 평소와 똑같이 야근하고 회식에 참석했다. 그러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면서 ‘그래도 암수술인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지’ 싶어 뒤늦게 회사에 알리고 이러저런 일들을 정리했다.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다만 몇 개월이라도 회사 쉴 생각을 해야 정상인 것 같은데 어째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넘어갈 작정이었던 걸까. 아마도 그렇게 하면 진짜 아무 일도 없던 게 될 것 같았나보다. ‘암 수술’같은 무거운 단어가 내 인생에 들어온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만큼 내 마음의 지축이 흔들렸다는 뜻일 게다, 역설적으로.

남아있는 휴가를 다 그러모으니 쉴 수 있는 기간이 꼭 한 달이었다. 오늘이 그 한 달의 마지막 밤이다. 그동안 수술을 했고, 거동이 편해진 이후로는 가족들과 두어번  여행을 다녀왔다. 책이랑 영화를 좀 보고 싶었는데 많이는 못 봤다.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고, 글은 못 썼다. 쓸 얘기는 좀 쌓였다. 잘 삭혀서 틈틈이 적어봐야지.
육아휴직 마치고 복직하기 전날밤, 싱숭생숭한 마음에 브런치에 글을 올렸던 게 생각난다. 오늘도 비슷한 마음이다. 한 달 동안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많이 생각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없을까. 나는 이제 ‘죽음의 가능성’을 품고 사는 몸이 되었다, 라고 메모장에 적었었다. 수술 전에는 그렇게 마음이 비장했다. 지금은 그렇진 않다. 수술은 잘 되었고, 의사는 ‘완치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몇 년 뒤엔 약을 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여행지에선 용기내서 맥주도 한 캔 마셨다. 사실 죽음의 가능성을 품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 가능성에 대해 자각해 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를 보니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와 ‘나는 죽는다’ 사이, ‘언젠가 죽는다’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쪽 생각으로 넘어오는 일은 젊을 땐 잘 되지 않는다. 암이라도 걸리면 모를까.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넘어갈 수도 있는지는 내가 한번 살아보고 다시 얘기하겠다.)

휴가의 마지막 밤, 할많하않...  그동안 생각해 둔 원칙들만 대강 좀 정리해 본다. 왜 이런 원칙을 정했는지는 천천히 또 적어보겠습니다.

1. 운동을 한다. 이게 대전제다.
2. 그러니까, 12시 전에 잔다. <- 가능하면 빨리 퇴근한다. 밤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3. 일주일이 한 번은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과 같이 저녁을 먹는다. <-업무 스케줄을 좀 더 치밀하게. 작전을 잘 짤 것.
4. 매년 발생하는 모든 휴가를 소진한다. 가능하면 몰아서 아이들과 2-3주 여행하기.
5. 꼭 필요한 일-방송/육아 외의 그 모든 일들에 엄격히. 가능한 거절한다.

이렇게 써 놓고 지금 시각은 새벽 두 시... 지난 몇 달간 뼈저리게 느꼈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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