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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May 14. 2018

그때 그 쑥떡, 오늘 이 쑥버무리

오랜만에 긴 글로 나누는 일상이야기네요^^

나의 첫 책은(‘첫책’이라니, 두번째 책도 있으리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온거냐)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이지만, 사실 내겐 몇 년 전부터 책으로 쓰고 싶어한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한테 요리 배우는 책.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이들 데리고 청주에 있는 친정에 내려가곤 하는데, 이렇게 엄마와 만날 때마다 요리법을 하나씩 전수받으면 어떨까, 그걸 책으로 쓰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한 달에 한 가지씩만 두세 해 쯤 배우면 봄나물 무치는 법부터 시래기국 끓이는 법까지 계절별로 리스트가 완성될 터. 레시피와 함께 그 요리에 얽힌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적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쓸데없이 비싼 카메라를 샀다고 구박받는 남편더러 사진 좀 찍으라고 하고.
긴 자취생활에도, 결혼 초 신혼때도 해본 적이 없던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아이를 낳고서야 들었다. 내 아이에게 어린시절 내가 먹던 그 음식들을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선구이나 닭볶음탕, 찌개류 같은 ‘일품 요리’들은 인터넷 보고 어찌저찌 흉내내겠는데, 밥상 위에 늘 있던 반찬들, 깻잎이나 나물, 쥐포채 같은 것들은 잘 되지가 않았다. ‘밑반찬’이라 불리던 것들, 찌개나 생선구이같은 메인요리 주변에 배경처럼 펼쳐져 있던 그 슴슴한 ‘일상의 맛’을 내 식탁에도 재현하고 싶었다. 고기만 먹지 말고 이런 것들도 먹어야 한다고 달래면서 아이 입에 갖가지 채소들을 넣어주고 싶었다. 나중에 하율이도 나처럼 ‘어릴 땐 가지무침 참 싫어했는데 나이 드나 봐, 이런 게 맛있네’ 얘기했으면 했다. 그래서. 그래서 배우고 싶었다. 냉이된장국, 미역줄기 볶음, 오이냉국, 고춧잎무침, 무말랭이무침, 이런 음식들. 모양 내는 것 말고 ‘그 맛’ 내는 법을, 정말 배우고 싶었다.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일기’라는 부제가 붙은 책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강창래)를 읽는데, 내가 상상만 하던 그 요리책이 떠올랐다. 엄마가 떠나시리라는 걸 알았다면 나도 이 분처럼 쓸 수 있었을까? 레시피라는 외피을 두른 사랑책이었다. 담백하게 적어내려간 음식 이야기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오르게 하는 글이었다. 음식과 관련된 그리움은 얼마나 서러운가. 엄마 돌아가시고, 마지막 김치통이 비어가는 걸 부여잡고 엉엉 울었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사라져가는지를 보는 것 같아서.   

얼마 전 경남 거창 일대로 여행을 다녀왔다. 한적한 시골에 머물다 오고 싶은 마음에 에어비앤비에서 저렴한 숙소를 검색해 즉흥적으로 떠났는데, 가 보니 덕유산자락 아래였다.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리는데 산동네라 풀이 많았다. 아이들이랑 쪼그리고 앉아 휴대폰 어플을 켜고 이건 무슨 꽃이네, 이 풀은 이름이 뭐네 하며 한참 놀다가 쑥을 발견했다. “하율아 이게 쑥이야. 이걸로 떡도 해먹고, 튀김도 해먹고, 국도 끓여 먹고 그러는거야. 엄마가 어릴 때 이거 캐러 많이 다니고 그랬어”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쑥이 한줌이었다. 아이도 신나서 쑥을 뜯어 건네주었다. “엄마, 여깄어! 나 많이 뽑았지?” 숙소에 돌아와 봉지에 쑥을 옮겨 담는데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이걸로 뭘 어째야 하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쑥을 캔 걸까. 그래도 차마 버릴 수는 없어서 꾸역꾸역 그걸 서울까지 가져왔다.


쑥이라는 이름의 골칫덩이를 냉장고 야채실에 넣어둔 채로 일주일을 보냈다. 깜빡 잊어버리고 한 달 쯤 지나서 음식쓰레기로 버리게 되길 내심 바랐는데 이상하게 잊히지가 않았다. ‘저기 쑥이 있다’는 사실이 계속 의식되어 신경이 쓰였다. 결국 하루 날을 잡고 쑥을 꺼내놓았다. 목표는 ‘쑥버무리’와 ‘쑥튀김’.

우선 쑥을 잘 씻어야겠지.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머리말에도 나물 씻는 이야기가 나온다.

채소를 씻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전혀 몰랐다. 나에게 ‘씻는다’는 것은 때수건에 비누칠을 해서, 때수건이 없으면 그냥 비누칠을 해서 문지르다가 물로 잘 헹궈내는 일이었다. 먹을거리를 씻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큰 이파리나 작은 이파리, 시금치 같은 것들, 냉이 같은 것들에 비누를 어떻게 묻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 작고 많은 이파리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문질러주나. -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11p

아마 처음 ‘요리계’에 입문한 사람들은 다들 한 번씩 하는 생각일 것이다. 예전에 강다솜 아나운서랑 방송을 할 때, 그녀가 <찾아라 맛있는 TV>라는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와서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선배! 선배도 혹시 양배추 씻는 법 알고 있었어요?” 양희은 선생님과 함께 시골에 다녀오는 촬영이었는데, 거기서 ‘양배추를 씻어오라’는 심부름을 해야했던 모양이었다. 양배추 한 통을 받아들고 수돗가에서 이걸 어떻게 씻어야 하나 난감해해서 놀림을 좀 받았단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선배도 알고 있었어요? 양배추 낱장을 하나하나 뜯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는 한참 고민했잖아요~” 쑥잎을 씻으며, 그 때 다솜이의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쑥을 씻어보는 건 나도 태어나 처음이다. 흐르는 물에 갖다대니 마치 코팅이라도 된 것처럼 잎에 물이 스미지 않고 흘러내리는 게 신기하다. 뿌리가 딸려온 것들을 잘라내고 한잎 한잎 꼼꼼히 씻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어릴 때 엄마가 하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상추건 나물이건 썩썩 문질러서 금방금방 씻었던 것 같은데, 과연 그 바빴던 엄마가 채소잎 한장 한장을 꼼꼼히 씻었을까 뒤늦게 의심스럽다. 한줌씩 대충 씻어도 깨끗이 만드는 엄마만의 비법이 있었던 거라고 믿어야지.
재료 준비를 대충 마무리하고 하율이를 식탁으로 불렀다. 신나게 뛰어와 팔을 걷어부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쌀가루를 채에 거르고, 소금 설탕 넣어 뒤섞고, 쑥잎을 넣어 버무린 후 찜기를 가스불에 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싶어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봤는데...

망했다. 아랫부분은 쑥과 쌀가루가 찐득하게 뒤섞여 죽처럼 됐고 윗부분은 쌀가루 뭉치들이 구슬 알갱이처럼 제멋대로 굴러다닌다. 망하긴 했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다년간의 살림 경험 상 알게 된 건데, 원래 이런 요리들이 있다. 인터넷 레시피나 요리책 설명대로 해도 이상하게 잘 안되는 요리들. 파스타나 볶음우동 같은 건 레시피대로 따라하면 그럴듯하게 되는데 홍합미역국, 계란찜, 고사리무침 같은 것들은 기어이 망쳐서 엄마에게 전화로 물어보곤 했었다. 쑥버무리도 그런 종류의 음식이었을 뿐이다. 쑥튀김이 제대로 맛나게 완성된 것이 그 증거다. (비슷한 예로 계란찜이 있다. 계란말이는 어떻게든 되지만 계란찜은 레시피대로 한다고 되는 요리가 아니다.)
아이들이 손도 대지 않는 망한 쑥버무리를 남편과 나눠먹으며, 어릴 적 동네 돌아다니며 쑥을 캐던 이야기를 했다. 그냥 시골도 아니고 ‘심한 시골’에서 자랐기에 가능한 경험담이다. 한 봉지씩 쑥을 뜯어다 주면서 엄마에게 “이걸로 쑥떡 만들어 줘” 했던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많이 뜯어왔느냐며 활짝 웃던 엄마 얼굴과 함께. 그러곤 쑥떡이 실물로 나타날 때까지 몇 번이고 ‘언제쯤 되느냐’고 묻곤 했었다. 며칠, 몇 주 쯤 지나면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수연이가 뜯어온 쑥으로 만든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며 쑥떡을 내오셨는데.... 오늘 엉망진창 쑥버무리를 해먹어보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그 쑥떡은 정말 내가 뜯어온 쑥으로 만든 것이었을까. 내가 뜯어온 건 정말 쑥이 맞았을까. 만약 쑥이 아니었다면, 혹은 떡을 만들기에 양이 너무 적었거나 상태가 별로였다면 엄마는 따로 쑥을 캐러 나가셨을까.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불쑥 전화해서 물어볼 뻔했다. 그때 내가 캔 거, 진짜 쑥이었냐고. 그 때 그 떡, 진짜 내가 캐 온 쑥으로 만들었느냐고. 그냥 그것만 좀 확인하겠다고 하면 하나님도 은근슬쩍 눈감아주지 않을까, 얼른 그것만 확인하고 끊겠다고 하면 통화 한 번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잠깐 해 보았다.


P.S 한 달에 하나씩 엄마한테 요리 배우는 기록집, 괜찮지 않나요? 누가 좀 써 주시면 좋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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