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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Dec 27. 2018

공동체의 부고에 대해

명예퇴직 명단을 보고

명예퇴직자 명단이 공개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새삼 찌르듯이 마음이 아파왔다. 인생을 두고 선택한 한 사람의 결정에 대해 타인인 내가 마음 아파 하는 것은 실례일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마음이 안 그렇다. 말할 수 없이 아쉽고 속상하다.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썼다.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오기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죽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생각했다. 죽었다고, 죽어간다고 느껴졌던 순간이 많았다. 이것이 부고인가 싶은 소식을 받아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어찌저찌 여기까지 왔다. 그것이 부고가 아니었던가. 아직 살아있는 것인가, 이 회사는. 젊고 유능한 구성원들의 퇴사는 공동체의 부고인가 아닌가.

명예퇴직 신청 기간 동안 나 역시 고민했다. 짜증이 폭발해 다 그만두고 다른 일 한번 해보고 싶기도 했고, 하율이 피아노 사러 악기점에 갔다가 가격을 보고 명퇴는 무슨, 군소리 말고 계속 다녀야지 생각도 했다. 그만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날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마지막 한조각의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게 얼마나 불행한 사태인가 생각한다.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가 고작 사원의 마음을 잡아두는 요인이 월급인 것도, 먹고살 길 막막해 회사에 붙어있어야 하는 무능한 사람이 피디인 것도, 서로가 얼마나 불행하고 한심한가. MBC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미래가 있나? 이토록 꼰대스러운 조직에? 라디오는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나. 대중이 듣고 싶어 하는 라디오와 내가 만들고 싶은 라디오의 간극은 견딜만한 폭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조직이 내게 원하는 일 사이의 괴리는 또 어떤가. 내가 이 회사에 남아있는 게 다른 길을 가는 것보다 덜 불행할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결국 여기에 닿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뭔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 걸까.

허세와 객기를 걷어내고 정직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솔직히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 재미있는 건수를 발견해 이걸 어떻게 요리할까 입맛 다시며 키득거릴 때, 갖은 스트레스로 죽을똥 살똥 우울해하던 게 다 잊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지하게 명예퇴직 신청을 고민했다. 이 일을 좋아하지만, 퇴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힘들다면, 조직과 자꾸만 부딪힌다면, 내가 이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영화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이 영화의 주제는 Survive와 Live의 차이를 생각해보는 데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걸 상기시키며 이렇게 적는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인 생존에 만족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이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 그런 갈망이 없다면 그것이 곧 노예의 삶이라는 것.” 이런 문장도 보인다. “생존의 트랙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갖는 때가 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가장 성공적인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가끔 이런 의문에 걸려 넘어진다.” 명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스티브 맥퀸 감독과 신형철 평론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 말이다. MBC에 입사한 것 자체로, 내 일 자체로 그 질문에 답이 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 질문이 발목을 잡을 때 툭 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자꾸만 걸려 넘어진다. 무릎이 깨져 쓰라린 날들이 많다. 차마 명퇴를 신청하지는 못했지만.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묻게 만드는 일들이 자주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나는 이 직업을 좋아하니까. 그러나 내가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든다면 용기를 내 생존의 트랙을 벗어날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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