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오는 글 ‘마지막 수업의 상상’에서는 정년퇴임을 앞둔 교육자 중 ‘마지막 수업’을 할 자격을 가진 이는 누구인가에 대해 얘기한다.
그렇게 자리보전을 했다고 해서 모두 마지막 수업을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컴퓨터를 다운시키지는 않지만 꾸준히 속도를 느리게 하는, 애매하게 질 나쁜 바이러스처럼, 평생을 태업으로 일관한 교육자들도 마지막 수업을 향유할 자격이 있을까. 학생이나 동료를 상대로 성폭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강도 성추행을 꾸준히 해온 사람도 마지막 수업을 개설할 자격이 있을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무비판적인 태도로 한세상 살아온 이들도 마지막 수업에 나타날 자격이 있을까. 교육과 연구를 등한시하고 권력을 좇는 것으로 일생을 보낸, 그러나 그 덕분에 거창한 보직 경력이나 수상 경력을 쌓은 이들도 마지막 수업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p139
최근의 내 고민을 정확히 짚어낸 문장이어서 밑줄을 빡빡 그었다. 요즘 나는 ‘함’의 실수와 ‘하지 않음’의 실수에 대해 생각한다.
말이 많고 감정적인 나는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한다. 그 말은 하지 말걸, 나서지 말걸, 하지 말걸, 이런 생각을 안 하는 날이 없다. 호들갑스러운 성격이어서 무엇을 ‘하는’ 실수에 익숙하다. 실수란 ‘괜히 했다’고 생각하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함’의 실수 뿐 아니라 ‘하지 않음’의 실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 않음’의 실수는 김영민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매하게 질 나쁜 바이러스처럼 평생을 태업으로 일관’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무비판적인 태도로 한세상 살아가는’ 종류의 잘못이다. ‘함’의 실수는 그 잘못이 눈에 보여서 주위의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하지 않음’의 실수는 쉬이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에게도.
피디란 ‘함’의 실수보다 ‘하지 않음’의 실수를 더욱 경계해야 하는 직업이 아닐까 한다. 새로운 시도 없이 관성대로만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그 피디는 ‘보통 피디’, ‘평범한 피디’가 아니라 ‘시도하지 않는 실수를 지속적으로 해 온 피디’이다. 어찌 보면 이게 더 나쁘다. 해서 실수한 건 최소한 경험이라도 남으니까. 시사 프로그램에서 어떤 이슈를 다루지 않는 파장은 다룸으로 인한 파장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가진 언론인 한 명’ 때문이 아니라 ‘다루지 않는 (다른 걸 다루는, 평범하고 성실한) 언론인 열 명’ 때문에 사회가 퇴보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피디만 그럴까. 어른들 모두에게 적용해 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세상에 큰 폐 끼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혹시 무언가를 안 하는 폐를 지속적으로 끼쳐온 건 아닌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잘 살았다’는 말을 하려면 ‘함의 실수’ 뿐 아니라 ‘하지 않음의 실수’도 경계해야 한다. 부당함과 불합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나는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혹 그게 ‘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닌가.
추하지 않게 나이 들고 싶다고 점점 더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데, 좋은 어른과 나쁜 어른 사이에 보통 어른이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좋은 어른 보통 어른 나쁜 어른
이런 식으로 그라데이션처럼 분포돼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어른의 여집합이 안 좋은 어른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나이 든다는 것은 기성세대가 된다는 뜻이고, 기성세대는 세상이 지금의 모습이 된 데 많든 적든 책임이 있다. MBC 라디오국에서 10년 간 살아온 나는, MBC 라디오국의 현재에 10년 몫의 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