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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es Hur Jun 12. 2017

기억에 남을 축제

마라톤, 투표, 축제

나는 2008년 가을부터 미국 엘에이에서 거의 9년째 살고 있는 한국인이다.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의 도시답게 이곳에서는 정말 다양한 축제가 열린다. 그동안 가장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축제를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2014년 엘에이 마라톤을 선택한다.


2014년 엘에이 마라톤 출발선에서 아내와 함께. 뛰기 직전이라 그런지 참 해맑다.


엘에이 마라톤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큰 행사였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runner로 등록한 사람만 5만 명이 넘었고, 달리는 내내 마라톤 코스를 따라 옆에서 응원하고 구경하는 사람도 끊이질 않았다. 날씨도 참 좋았다. 아침에는 선선하고, 10시가 넘어서야 더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다른 이와 경쟁하고, 누군가는 자기 자신과 싸우고, 누군가는 생판 모르는 runner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이 복합적인 이벤트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즐거웠다. 나름 신나는 기분으로 내 인생 첫 마라톤을 뛰었다. 내 발과 다리는 처참해졌지만.


오늘은 예상치도 않게 기억에 남을 만한 축제를 경험했다. 점심시간쯤 재외국민 투표를 위해 엘에이 총영사관에 들렀다. 이곳은 남가주 200만 한인을 위해 다양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30분-1시간 정도 기다리는 게 보통이고 조금 부산한 편이다. 하지만 투표하는 날은 (내가 방문했을 때만큼은) 항상 예외였다. 한산하다 못해 썰렁할 정도. 하지만, 오늘은 건물 주변에서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뭐지? 이 부산함은?’


영사관 뒤쪽 주차장에 들어서면서,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영사관 옆에 딸린 작은 주차장을 넘어, 그 옆 주차장, 그 뒤쪽 공간까지 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뒤 가운데에 보이는 고동색+회색 건물이 총영사관. 내가 사진을 찍은 위치에 있는 주차장(사진에서는 안보임)까지 포함해서 차들로 가득함.


피부가 살짝 찌릿했다. 영사관에서 가장 먼 쪽에 겨우 주차를 하고 걸어가는데, 영사관 뒤쪽에서 ‘무료 안과검사’ 광고가 보였다. 영사관 앞에는 의료 서비스용(?) 버스가 서 있었다.


‘아… 검사받으러 사람들이 모인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영사관 1층에 들어서자, 여러 명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게 보였다. 2층 투표장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끊임없이 투표를 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투표를 마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주차장에 있는 그 많은 차량이 투표 때문에 모여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쯤, 엘에이 마라톤을 뛰면서 느꼈던 감정 그 비슷한 무엇 + 약간의 저릿함을 느꼈다.


나는 지난 9년간 엘에이에 살면서 대한민국 관련 행사에 몇 번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받는 느낌은 주로


‘응? 왜 이렇게 한산하지?’


였다. 2015년 세월호 1주기 집회에서는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잠깐 들렀던 사람까지 합쳐서 대략 200여 명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만 명 중 200명은 0.01%다. 대한민국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던, 박 대통령 탄핵 집회도 엘에이에서 열렸다. 이 날에는 외국인도 종종 보였지만, 모인 사람은 대략 400명 정도. 즉, 0.02%. 방금 기사를 뒤져보니, 그동안 재외국민 투표율은 바닥이었다. 선거권자 수 대비로 따지면, 투표율은 10%를 넘은 적이 없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는 약 3%, 2012년 대선은 약 7%. 그리고 총영사관 투표장에서 어렵지 않게 이런 분위기를 느껴왔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봐 굳이 말하자면, 투표를 안 하거나 못하는 분들을 비난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예상치도 못하게 오늘 받았던 이 저릿한 느낌을 블로그에 남기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몸소 참여하는 축제인 선거 역시, 다른 여느 축제처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수록 더 뜻깊고 기억에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외국민 투표 마감은 아직 하루가 남아있다. 국내에서 투표하는 분들도 이런 느낌을 만끽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 일단 오늘 엘에이 분위기는 좋았다. 난 투표는 마쳤고, 이 축제에서 남은 건 하나. 기분 좋게 5월 9일 치맥 고고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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