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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es Hur Jun 12. 2017

시를 쓰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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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몸살감기를 앓다가, 어제저녁부터 회복이 좀 되기 시작했다. 나는 따봉 오렌지를 재배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감기에 걸리다니. 이 약골... 올해는 동계 훈련을 꼭 하리라. 어쨌든, 골골~ 대면서 누워서 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학생 시절 특히 자유시간이 많던 때가 떠올랐다. 바로 screening 시험을 준비하던 시기다. 이 시험은 총 다섯 과목을 보고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며 통과를 못하면 학교에서 잘린다. 말 그대로 입학생을 걸러내기 위한 복불복 서바이벌 장치다. 이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연구와 수업을 조금 수월히 하는 게 일반적이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중한 자유시간에 나는 종종 딴짓을 했다. 뭐 특별한 건 아니었고, 미드와 영화 보기 정도. 그중에서도 어떤 영화는 내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바로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다. 방금 위키피디아에서 확인을 해보니, 영화 <시>가 감독님의 가장 최근 작품이구나. 그 영화 이후로 영화감독은 더 이상 안 하시는 건가? 제작을 하신 영화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좀 아쉽네.

시를 쓰는 마음으로 영화 <시>의 대본을 쓰신 이창동 감독님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는 다 봤지만, <시>는 충격적이었다. 내 머릿속에 푹 박혀서 일주일 정도는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했다 (시험공부는 뒷전;;). 그러다 보니 내 가치관에도 영향을 주었나 보다. 감독님의 다른 영화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는 아마도 대학교 때 (설렁설렁) 봤던 것 같고, screening 시험공부를 하던 시기에는 <밀양>과 <시>를 봤다. 이 영화를 보고 받았던 충격은, 적확하게 말하면 '너무나도 큰 수긍'이었다. 이창동 감독님이 이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에


'그래. 이게 정말 중요한 거야. 이런 마음으로 살고 싶다 정말.'


이런 느낌을 받았고,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닭살이 돋고는 했다.

이창동 감독님이 <시>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타인에게 공감하는 과정과 의미'에 대한 것이다. 치열한 자기 탐구를 하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가장 밑바닥을 마주할 때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고, 그것이야 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라는 메시지. 그것은 시를 쓰는 과정과 같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주인공이 무던히도 시를 (제대로) 쓰려고 노력하다가 공감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결국 '아네스의 노래'란 시를 완성시킨다. 영화 마지막에 그 시를 읊어주는데,  정말 감동적이었다. 지금 찾아서 다시 읽어봤는데 닭살이 돋는다. 주인공이 절반 정도 읽고 죽은 아이가 이어서 읽는데, 그런 연출과 그 시의 내용이 딱 맞아떨어지면서 큰 울림이 전해지고 슬픔이 밀려온다.


영화 <시>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아네스의 노래'에 나오는 '당신'을 '비참한 나의 현실, 혹은 비참한 인간사'라고 받아들였는데, 천상병 시인의 <귀천>도 본인의 삶의 불행을 마주하고 쓴 시다. 그러고 보니, <귀천>도 내 가치관을 많이 바꿨다. 나는 시를 거의 읽지 않는 사람인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나에게 있어서 <귀천>은 나 자신과 내 삶을 마주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쳐준 작품이고, <시>는 더 나아가 '공감'의 의미와 방법을 가르쳐준 작품이다.

활짝 웃고 있는 천상병 시인. 그는 이렇게 웃을 수 있는 분.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세상에 잠시 소풍을 왔다고 말한다. 소풍은 그 전날부터 오롯이 준비하는데 바칠 수도 있는 짧은 이벤트다. 함께 놀 친구들, 보물찾기, 장기자랑, 그리고 맛있는 김밥이 있는, 설레고 기대되는 그런 시간. 그런데, 천상병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동네 비렁뱅이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다니.  <귀천>을 읽고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까?'


'나도 세상에 소풍 왔다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그때는 나름 심취해서, 인사동 '귀천'이라는 찻집에 가끔 찾아가기도 했다.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 낑깡차와 한과가 참 맛있었다. 목순옥 여사님(천상병 시인의 아내)의 따님? 사촌동생?이 운영하고 계셨는데, 나중에는 나를 알아봐 주시기도 했다. 때로는, 끄적끄적 혼자 (시가 아닌) 시를 써 보기도 했다. 잃어버려서 다시 읽어볼 수는 없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오버와 허세뿐;; 예를 들면, 예전에 남미 여행을 하다가 야생 고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조금 받았던 감동에 대해 시를 쓴 적이 있다. 기억나는 부분은, '내 다시 돌아오리라', '유기농 자연이 잉태한',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잉카 콜라', 뭐 이런 거 ㅋㅋㅋ 같이 여행하던 친구에게 보여줬고, 같이 낄낄 대고 비웃으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아... 뭐라고 썼는지 다시 보고 싶다. 아내에게 보여주면 진짜 재미있을 텐데. 몇 년 후, 같이 과테말라를 여행하던 후배에게 이 이야기를 해줬다. 이 아이도 여행 마지막에 시를 써버렸다. 이건 전염병인가. 나에게 보여주지는 않았고, 너무 쪽팔려서 죽을 때까지 혼자서만 볼 거라고 했다.


어쨌든, <시>를 본 이후로 5년 동안, screening 시험도 보고, 연예도 하고, 시련도 겪고, 결혼도 하고, 졸업도 하고, 직장도 구하고 살고 있다. 그 영화의 영향인지, 그동안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우선 나를 돌아보려 했다. (정확히 말하면, 몇 번 그런 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할 수 있는 것과 죽어도 못하겠는 것을 몇 가지 정리할 수 있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나에게 맞는 방법과 안 맞는 방법은 무엇인지, 나와 잘 맞는 사람과 안 맞는 사람은 누구인지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이 현재 나의 삶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아내와 결혼에 대해 처음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내 단점을 견딜 수 있고 내 장점을 고마워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한 선행 조건은, 나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인 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 결혼한 지 3년밖에 안되긴 했지만, 그때의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좋고 감사하다.


요즘은 공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글을 종종 본다. 일단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동안 내 주변 사람들,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들과 친구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공감하면서 살았나. 현재 내 관심사는 가족 챙기기, 회사일 잘 하고 많이 배우기, 돈 모으기, 네트워크 만들기 정도다. 미친 일이 자꾸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는 굳이 공감하며 살기 좀 지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름 조절을 하고 적당히 해야 내 생활을 무너뜨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걸까? Facebook, Twitter 등 Social Network에서 많이 하는 간단하고 빠른 표현(사교와 놀이)에 난 더 익숙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타인에게 공감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의 많은 훌륭한 작품에 보다 쉽고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삶은 점점 더 자유롭고 더 많은 여유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본인과 타인에게 시간과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다. 또한, 공감은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제대로 관찰하면서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에 나온 대사처럼,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마음을 내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내 지인은 '느리게 읽기'를 주제로 한 오프라인 독서클럽을 만들었다. Facebook에서는 '페친의 책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독서를 하고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발전했다. 굳이 '느림'을 붙인 이유는 느려서 생기는 여백에 자신을 투영하고 싶어서였을까? 나 김장원을 공감에 넣어본다면 어떨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창동 감독님께서 시를 쓰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듯이, 나도 그런 마음으로 내 일을 할 수 있을까? Speech and Language AI 기술, 기계학습 기술이 공감에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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