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좋은 회사를 나왔어?

회사 간판이 없더라도, 내 경험 자체가 무기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by sunnynjoy

이직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였다. (과장 조금 보태서)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복지나 대우도 좋았고, 회사에서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왜'라는 질문의 의도는 사람마다 좀 달랐는데, 내심 흥미로워하면서 전 회사의 흉을 기대하는 사람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사람도, 공감하며 내 길을 응원해 주는 사람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궁금한 사람도 있었다. 생각보다 더 다양한 반응이었고, 이 모든 게 '왜'라는 한 글자로 동일하게 질문된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같은 질문인데 느껴지는 온도가 너무 다르달까.


몇 번 이 질문에 답을 하다 보니, 레퍼토리도 생겼다.

"예전 회사 너무너무 좋았어. 지금도 연락하면서 잘 지내. 좋은 분들이야. "

"싫어서 나온 건 아니고, 새로운 거 해보려고 나왔어. 진짜야 ㅋㅋㅋ "

"스타트업 이름은 XX고, 아마 네가 모르는 곳일 거야."

"괜찮아. 굶어 죽진 않겠지. 망하면 맛있는 거 사줘~"

뭐 이 정도? 긴 고민, 막연한 불안감, 기대감을 구구절절 늘어놓기에는 그들도 그 정도로 진정성이 없는 질문일 때도 있었고, 내 생각이 정리가 안 됐을 때도 있었다.


돌아보건대, 그 좋은 곳을 떠나서 스타트업에 조인한 이유는 하나였다.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



큰 외국계에서 일 잘한다고 칭찬받으면서 일하는 건 아쉬울 게 하나도 없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를 나가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거란 불안감이 언젠가부터 생겼다.


소셜 플랫폼에서 광고 효율을 높이고 마케팅을 돕는 역할을 하다가, 이 플랫폼을 떠나면 난 뭘 할 수 있는 건지.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수익을 내는 판매자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가, 이곳을 떠나면 나는 어떤 걸 지원할 수 있을지. 플랫폼의 이름을 떼고 봤을 때 내가 어떤 역량이 있는 사람일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솔루션 세일즈, 그것도 엄청 큰 회사의 탄탄한 솔루션을 컨설팅하는 것 말고 나는 어떤 걸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회사가 싫은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첫 번째 옵션은 내부 이동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역량을 키우기 위해 다른 기회를 알아봤지만, 아직 연차가 낮은 나는 갈 수 있는 역할이 없었다. 큰 기업들은 이전 경험이 있어야 그 경험을 발판 삼아서 새로운 역할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정글짐 같은 기회가 생기곤 하는데, 바로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 나는 발판 삼을 기회가 부족했다.


내부 이동으로 새로운 역량을 키우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 때쯤,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일을 더 해야 내가 가장 잘 배우고 가는 것일지 고민을 하게 됐다. 그러던 무렵, 스타트업에서 이직 제안이 왔다. 코로나 시국에 서비스를 해외로 진출시키는 역할인데,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가서 시작하면 된다고. 몇몇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사람들마다 답변이 달랐다. 결국 본인의 경험과 성향을 기반으로 답변을 하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서 답을 내려주는 건 불가능할 테니,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자연스레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가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은 뭔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직 안 해봤기 때문에. 그래서 긴 고민 끝에 나는 이직을 하기로 했다. 내 comfort zone을 벗어나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고, 내 경험도 넓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 세상이 넓어질 거고, 그게 내 경쟁력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퇴사 선택을 내리는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을 많이 관찰했는데, 똑같이 큰 회사를 다니고 있더라도, 실제로 본인의 comfort zone을 넓혀놓은 사람들이 일을 정말 잘하고 만족도도 높았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을 겪고, 본인이 무언가를 만들고 책임져본 후에 큰 회사에 와서 그 날개를 펴는 멋진 분들을 보니, 나도 그렇게 내가 책임져 보고, 만들어 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quit-job-memes-1.jpg 솔직히 떠나는 날 이렇게 밝지 못했다. 너무 아쉬워서 많이 울었고, 나와서도 팀 사람들이 그립고 내 막내 생활이 아련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경험을 넓히기 위해 조인한 것인 만큼, 거의 모든 것을 다르게 가져갔다. 스타트업에 조인하며 달라진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조언을 하는 사람 -> 실행을 하는 사람

마케팅 지표 트래킹 -> 서비스, 사용자 지표 트래킹

한국 시장 담당 -> 해외 확장 담당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회사 ->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회사

매니저가 담당하는 막내 팀원 -> 회사를 이끄는 리더십 중 한 명


이렇게 내 세상을 뒤집어 놓는 결정을 함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내 능력을 좀 높여보고 싶었다. 내가 있는 곳은 너무 달콤한 꿈같은 곳이었지만, 깨야 하는 꿈이었기에. 이왕 깨는 꿈 제대로 깨고, 내가 더 커질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와서 보니 현실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지만, 냉혹한 현실로 장렬하게 뛰어든 건 지금도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내가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좀 더 부딪히고 상처도 입고 회복도 해봐야 한다. 외국계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어디를 가도 회사 이름 없이는 무언가를 이뤄내기 어렵지 않도록. 나중에 외국계나 대기업을 돌아오더라도 내 경험으로 비즈니스를 성장시키고 도울 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라는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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