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눈치여 안녕
뉴욕에서 때때로 '모든 사람이 불친절해' 주간을 겪는다. 특히 우주의 모든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세상의 불운이 나에게 쏟아지는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 카페의 직원이 커피를 쏟는다든가, 주문한 것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든가, 계산이 잘못되서 귀찮게 된다든가 등등 누군가의 사소한 실수가 쌓여서 나의 거대한 불운 네트워크를 생성했다. 초기에는 이 모든 것이 차별로 보였다. "내가 영어 발음이 안 좋다고 차별하는 거야." "내가 아시아인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내가 예쁘지 않다고 차별하는 거야." 차별의 리스트는 매번 갱신되었다. 돌이켜보면, 결국 이 리스트는 그 당시 내 마음속 열등감 리스트와 다름없었다. 이 모든 불운이 내가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 내가 우주만물의 모든 원인제공자라는 생각. 하지만 지금으로선 해결방법이 없으므로 이 불운이 계속될지 모른다는 공포. 자신감이 바닥을 쳤을 때 불운의 주간이 시작되는 셈이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불운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공포가 그걸 '불운'으로 포장했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타인과 대화를 할때 반드시 피해야 하는 태도가 있다면, 타인이 상대나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assumption을 하는 것이다. 한국 말로 옮기자면 타인의 생각을 '넘겨 짚지 말자' 정도일까. 타인의 생각을 내 잣대로 재단하는 건 실례라는 것에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실천하기 쉬운 태도가 아니다. 왜냐면 한국인의 '눈치'는 완전히 상반된 태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위풍당당 모던 휴먼인 줄 알았는데, 웬걸, 해외에 나와보니 눈치 고수 빼박 코리안이었다. 나의 뇌구조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정밀한 눈치 매커니즘을 진화시키고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면면을 재빠르게 파악한 뒤 그 사람의 시선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고 호감을 얻는 구조였다. '우리가 남이가' 및 '한민족'을 강조하는 세상인 코리아에서 모두 한국어로 소통하고 남의 생각이 거기서 거기라고 단정하며 눈치로 점철된 소통을 해왔더랬다. 나를 적절하게 드러내고 남을 적당하게 존중하며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코리안 비지니스 스타일의 특징이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태도를 미국에서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른 문화와 다른 토양에서 자란 완벽한 이방인들이었기에 내 눈치 매커니즘은 그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사실 한국에서도 그 매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는 지는 의문이다. '한민족' '한핏줄'이라며 우린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지만, 그럴 리가 없다. 모두 남이고, 생각은 제각각이고, 만인이 만인을 이해 못한다. 이해하고 있다는 건 그냥 나의 환상이자 매너리즘이었을 뿐이다.
어쨋거나 미국에서 눈치 매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으니 내 마음은 더 절박해질 수밖에 없다. '왜 저렇게 반응하는 거야? 내가 싫은 거야?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더 참담한 경우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없어 그 자리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의 태도를 카피할 때였다. 유명 배우를 인터뷰 하는 자리에서, 영화와 관련은 없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기자가 있었고, 그 사람을 따라하려고 억지로 질문을 짜냈다가 정말로 중요한 내 질문을 못 하고 말았다. 순간의 분위기에 휩쓸려 '이 때는 이런 걸 하는 게 맞겠군'이라고 내 멋대로 넘겨 짚었다가 망한 날이었다. 정신 상태가 프로페셔널 영역까지 침범을 하자 비로소 '나 많이 이상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넘겨 짚기가 정신을 갉아먹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상대방이 분명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솔직한 속내는 그게 아닐 것이라고 초조해하며 진짜 속내를 궁금해 하는 것. 다시 말해, 발화로 이뤄진 소통 자체를 불신하게 되는 것. 내가 넘겨짚은 상대방의 생각이 진짜라고 믿으며 왜 그렇게 생각할까 원인을 찾아 일파만파 시나리오를 쓰는 것. 대개는 모두 부정적인 생각이며 나를 꾸짖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둘째는 자신의 확고한 입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고 자신의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포기하는 방식이다. '분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도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그렇다고 넘겨 짚고 믿어버린다. 그리고 무언가를 못하는 것을 그 '분위기' 탓으로 돌린다. 결국 세상이 다 싫어지는 사태가 벌어진다.
벗어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생각을 멈추면 된다. 타인이 말하지 않은 말로 생각이 옮겨가는 순간 생각을 끊는다. 내 머리가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하는 순간 생각을 끊는다. 모르면 물어 본다. "이런 의미로 말한 건가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생각의 가지치기를 종료한다. 눈치를 줬는데 못 알아들었다고 추후 상대방이 불평을 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상대방의 태도가 옳지 않은 것이다. 소통은 도박도 평가도 아니다. 넘겨 짚기는 눈앞의 진실을 가로막는 후보정 필터같은 것일 뿐이다. 슬프게도 눈치와 넘겨짚기는 한국에서 여자로서 혹은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숙련해야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 투명한 구속복을 잘 갖춰 입을수록 현명한 여자가 된다. 그 현명함의 레벨에 도달하기 위해 assumption의 안테나를 쉴틈없이 세우며 긴장을 해야 한다. 정말 소모적인 정신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어떤 한국 분들은 말을 스무바퀴쯤 돌려서 말해서 도무지 대화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런 소통 방식이 이해는 가는 한편, 발화의 정보값만 주고 받는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이런 분들과는 점점 소통을 하지 않게 된다. 영어 대화라면 거의 숨은 의미가 없다. 엄청난 고차원의 정치적 대화이면 모르겠지만 내 능력 수준에서는 주고 받은 말만 따르면 된다. 괜한 assumption의 함정에서 벗어나던 때, 나는 생각의 해방같은 걸 느꼈다. 말이 소통의 중심인 곳에선 행간을 읽을 필요가 없다! 얼마나 편한가! 모르면 물어 보고, 재차 삼차 확인하는 것도 민폐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젠 영어를 못한다고 타인을 무시하면 차별주의자라고 지탄을 받는다.
여전히 소통은 미숙하고 타인의 말을 넘겨짚지만, 코리아 태생이면 누구나 달고 사는 '제 3의 시선'은 점점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다. 부작용이 있다면 말의 '액면가'만 믿다 보니 거짓말에도 잘 넘어간다는 것. 카톡 대화에서도 행간을 읽는 기술이 급격하게 퇴화되어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트위터에서도 토픽에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트윗을 한다.(그리고 팔로워를 잃는다...) 어차피 말은 지나가는 것. 타인도 내 말을 그렇게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못난이가 투사한 타인이 나의 지옥이 되지 않게 되자 우주의 기운이 돌아왔다. 여전히 불운 주간은 불현듯 찾아오지만 타인으로 인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다.
덧. 뉴욕의 '모든 사람이 불친절해' 기간은 한겨울이다. 겨울은 지루하고 힘들기 때문에 모두 피곤한 표정이다. 반면 여름이 되면 세상 친절한 사람들로 돌변하는 뉴욕 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