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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sgirrrl May 25. 2020

Don't take it personally

타인의 행동에 상처를 주지 않고 받지 않는 주술 

내가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 때 상사는 조심스럽게 그 의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말을 끝맺으면서 그녀는 완화된 톤으로 덧붙였다. 

"Don't take it personally."

뒤에 붙은 'personally'는 '개인적으로'라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말을 한국식 대화어로 옮기면 '기분 나빠 하지마' '괜히 마음 상해하지마' 정도일 것이다. 왜 기분이 나쁠 일이 아니냐면, 이것은 너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일에 대한 논박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친구와 취향에 대해 신나게 떠들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좋아하는 무언가를 두고 조목조목 비판을 해대자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영화에 대한 비판인데 왜 네가 상처를 받아?"

화를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한 나를 보며 친구가 물었다. 그때즈음이었던 것같다. 'Don't take it personally'의 컨셉트를 절실히 깨달았던 때가. 


문명화된 사회화를 거쳐 일과 취향과 자신을 분리하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과 취향과 나는 거의 하나였다. 취향은 나의 종교와 같고, 일의 결과물은 나의 자식과 같아서, 그 두 분야에 대한 비난/힐난/비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나곤 했다. 뒤늦게 내가 사회화가 덜 된 인간인가 반성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았나 의심해본다. 우리의 언어 습관과 '눈치'라는 문화가 '개인적' 차원을 늘 건드리지 않나.  


예를 들어,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해보자. 부모는 말한다. "왜 성적이 이 모양이야?" 질문만 놓고 보면 원인을 밝혀주면 된다. 공부를 덜 했다든가, 실수를 했다든가, 예상보다 어려웠다든가 등등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묻는 이는 이 대답을 원하는가? "마땅히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네가 노력을 안 하고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더니 결과가 이렇게 된 거 아니니?"라는 유도 질문은 아닌가? 보통 이런 질문의 의도는 개인을 비판하는 데 있다. 습관적으로 대다수는 이 위기를 모면할 대답을 안다. "다음에는 잘 할께요." 질문과 대답 사이에 몇 단계의 암묵적 생각의 과정을 거치기에 이런 대답이 나오는 걸까. 회사 사정도 다르지 않다. 질문은 보통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일에 대한 비난은 일하는 사람의 태도를 힐난도 포함하고 있다. 이런 대화를 계속 하다 보면 자신에 대한 불신과 상처만 쌓인다. 'Don't take it personally'는 타인의 생각 혹은 노력의 결과물에 대한 지적 또한 하나의 의견일 뿐이며 그 사람의 생각과 태도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거부, 거절, 비판이 오가는 대화에서 관계를 지키는 안전장치 같은 관용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하나마나한 말같은 '기분 나빠 하지마'보다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라고 직역을 하는 게 나을 것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사모하거나 존경하거나 무조건 신뢰하는 사람의 경우, 그 무언가에 대한 비난의 의견으로 쉽게 상처를 받는다. 내 경우엔 영화나 음악이 그 대상이다. 어떤 이에겐 종교이거나, 아이돌이거나, 사회적 인사일 수 있겠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 무언가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그들의 비선호에도 논리는 있기 마련이다. 그 논리는 대개 일반적이어서 반박의 여지가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괜히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그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바보냐!" 등의 으름장이다. 무언가를 좋아해서 남과는 다른 우월감을 쌓고 있다면 이런 으름장의 강도는 더 심해진다. 어렸을 때라면, 뭐, 잘 모르니 친구들끼리 서로 뭐가 더 낫냐며 아옹다옹할 수도 있다. 그게 또 재미있는 경험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30대, 40대가 되어서도 자신의 취향이나 종교가 더 우월하기 때문에 더 나은 존재라고 자신감을 갖는 건 위험하다. 무엇이 왜 좋고 나쁜지 'don't take it personally'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성숙한 어른이다. 이런 태도를 빨리 배양하지 않으면 상처만 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을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선호와 비선호의 논리를 인지하고 그럼에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호를 한다면, 비선호자의 비판에 맞서는 수호자가 되어 굳이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선호의 대상보다는 앞에 앉아 내 눈을 마주보며 털털하게 의견을 주고 받는 상대방의 존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끼는 대상을 깔아뭉개는 목적으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더더욱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의견을 내놓았을 때 그 행위 자체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어르신들도 있는데 이 분들도 이럴 때 don't take it personally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은어나 유행어를 여러 사람이 함께 정리하는 얼반 딕셔너리(Urban Dictionary) 사이트에 가면 'Don't take it personallly'를 예의바르게 거절/거부하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가장 인기많은 정의는 '무례함에 대한 변명'으로, 꽤 반어적이다. 아마 엄청나게 관습적인 말이기 때문에, 할 말 다해 놓고 '기분나빠 하지마'라고 하는 정도로 일상에서 남용되는 듯하다. 하지만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사람 입장에선 이 말을 들으면 안심이 된다. 수많은 인종이 모여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 뉴욕에서는 서로 화법이 다르니 오해할 일도 많다. 잘 모르는 사이에 무례한 경우를 당하면 괜히 "혹시 나를 미워해?" "나를 차별해?" "나를 해꼬지해?" "나를 물먹여?" 등의 여러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데, 이 때 'Don't take it personally'라는 말을 들으면 '그래도 자신이 무례했다는 건 (혹은 선을 넘었다는 건) 아는군' 정도의 타협점은 생기기 때문이다. 예의의 의도이든, 변명의 의도이든 어쨋든 자신의 말이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할 거라는 걸 안다는 것이다. 거부 의사를 밝히는 순간에 "I'm sorry to say that, but...."이라는 말은 너무 과도하니 그 직전 단계의 말 정도 된달까. 

습관적으로 남을 무시하는 무례한 이의 행동을 처음 겪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이 말을 해주기도 한다. 그 때는 "쟤 원래 저런 사람이야. 신경쓰지 마" 정도의 의미인 셈이다.


일과 취향과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타인의 반대 의견에 흥분하지 않으려면, 일과 취향과 자신에게 각각 어떤 비판 지점이 존재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을 정말 personally 받아들이지 않고 타인의 의견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최상의 소통이 된다. 남과 대화를 할 때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요?" 질문을 누군가에게 던지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이 기술을 하루 빨리 터득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대화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괜한 말이 나의 머릿속을 잠시나마 혼란케만드는 불필요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별 의미 없는 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풀지 못한 오해들이 쌓이고 쌓여 내 인간관계의 그늘을 만들었겠지. Don't take it personally의 의미를 좀더 일찍 깨우쳤다면 더 나은 소통을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같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할 수밖에. 선을 넘지 않도록. 괜한 상처를 주고 받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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