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게요.
나는 원체 성격이 다정하거나 싹싹하지 못하다. 워낙에 페미닌한 성격이 아닌 엄마 밑에서 여성성을 물려받고 자란 것도 아닐 뿐더러, 밑에 남동생 둘을 둔 큰누나에게 다정함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런 성향은 그대로 인간관계에도 이어져 여러 사람들과 둥글게 지내기 보다는 나만의 투박한 친근감을 관대하게 이해해주고 좋아해주는 몇몇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다보니 언니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의 아첨과 사근사근함은 나에게 한없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는 항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언니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꾸준하게 연락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언제 그렇게 친했냐는 듯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모든 공통점은 갈대만치로 쉽게 흔들렸던 나의 20대 초중반을 꽉 붙잡아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활기차게 꽃피우는 20대 청춘의 시작에, 인생이란 시험지 앞에서 나의 선택은 모범답안과는 한참 멀었고, 이 선택을 꼿꼿하게 지켜낼 만큼 강인하지 못했었기에 유독 고약한 시기를 보냈어야만 했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늘 필요했으나, 대학생활을 즐기기에 바쁜 친구들. 그리고 의젓하게 혼자서 잘 이겨내고 있음을 보여줘야만 했기에 털어놓기 힘들었던 엄마.
그래서 그 공허했던 주변을 채워주었던건 세상에 나와서 알게된 그녀들이었다.
가벼운 연애, 고민 상담부터 시작해서 나의 깊은 속내를 털어놓을때 즈음 이면, 그래도 참 잘 살고 있다며 토닥여주었던 언니들. 나는 그렇게 언니들의 다독임을 응원삼아 이렇게 잘 자라왔는지도 모르겠다. 본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보다는 위태로웠던 나의 불안을 묵묵히 들어주었던 그들. 어른이 아닌 나보다 고작 몇 살 터울이었던 그녀들은 몇 발자국의 앞에서 굽어보고 상처받았던 나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고 공감해주었다.
어제보다 오늘 더 견고해진 오늘. 이제는 그 시절의 그녀들과 비슷한 나이의 내가 되어 나의 새로운 앞날을 채워줄 언니들과 함께하고 있다. 오늘 문득 조금은 데면했던 언니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맥주 한 잔을 하는 와중에 ‘그래도 네가 이렇게 먼저 만나자고 해줘서 너무 좋아.’ 라는 그녀의 말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 시절 나에게 언니들이란 단순한 친한 사람 이상의 ‘제 이야기좀 들어주세요.’ 의 외침에 응해준 유일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미성숙에서 성숙의 과정으로 한 걸음 나아가고 있는 요즈음. 이제는 30대가 된 우리 언니들의 새로운 질풍 노도를 귀기울여 들어줄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녀들이 어렸던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던 그 마음을 먹고 자라나 이제는 내가 더 깊은 사람이 되어 또 누군가의 언니가 되어주고. 좋은 동생이 되어 그녀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주고 싶다. 실없는 동생의 조언 말고 ‘아이고 그랬구나..’ 하면서 턱을 괴고 가만히 들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갖추고 싶다.
그렇게 화자에서 청자로 나이들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