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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니타 Nov 05. 2017

왜 돌려받길 바랄까.

결국 내가 편하자고 시작한 일인데.

너는 너무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주는데에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

오랜 내 친구가 청하 딱 한 잔에 얼굴이 벌게져서는 술잔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건낸 말이었다. 사실 이건 내 고질병과 다름없다. 지난 10년이란 시간 동안 나를 지켜본 이 친구도 그 사실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그 몹쓸 ‘불안’에서 비롯된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불안을 느끼는 나는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다. ‘어?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살짝 언짢은 표정으로 이야기 하는 것 같지?’ ‘왜 오늘은 기분이 안좋아 보이지? 나한테 마음 상한 일이 있나?’ 이처럼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시시콜콜한 주변 눈치를 살피다 보니, 왠만하면 화자보다는 청자의 입장에서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내어준다. 결국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답정너’가 바로 나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렴. 그래서 정말 대답을 잘 해주고 열심히 들어주었다. 근데 자꾸 ‘잘’ 들어주다 보니 사람들이 내게는 유독 본인의 고민을 쉬이 털어놓게 된다든지, (결국 모든 고민에 대한 결정은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귀결된다.) 맥락없이 빙빙 도는 이야기를 계속 한다던지. (우리는 이것을 ‘암걸리게 한다.’ 라고들 많이 이야기 한다.) 너무나도 쉽게 본인의 감정이라든지 마음상태를 털어 놓는다.


사실 ‘잘’ 말하기는 쉽지만 ‘잘’ 들어주기는 굉장히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써, 갑자기 이런 상황이 불합리적이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감정의 쓰레받이’가 된 것 같았다. 다른이들의 감정을 쓰레받이 처럼 주섬주섬 잘 모아서 받아주는. 그런 역할 말이다.


나는 일상에서 내가 이런 불합리함을 느끼고 울컥할 때가 있다보니, 다른이에게 내 감정을 쉬이 공유하며 공감해주길 기대하지 않는다. 각자 먹고 살기 팍팍한 요즘 같은 세상에, 내 앞가림 하기도 벅찬 시간에 이야기를 들어주며 토닥여줄 여유는 어느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부담을 주기 싫다는 마음도 클 뿐더러, 진지하게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보기 좋게 다른 감정으로 겉포장을 해놓는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앞서 나는 모든 것이 나의 ‘불안’에서 시작 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불안 요소를 해소하기 위해서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한 것일 뿐인데, 나는 왜 갑자기 그들이 나의 이 ‘노력’을 알아주길 바라고, 또 돌려받길 바라게 된 것일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서, 나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행한 일련의 방법들이었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이중적인건 내 자신이었고, 스스로를 위해서 노력한 것에 타인이 이 ‘각고의’ 노력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해 하지 않는 것이고, 두번째는 타인의 이야기를 기쁜 맘으로 들어줄 수 있는 마음 상태를 수련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를 골고루 갖추는 것이 사실상 내 인생의 과업과 같은 것이고, 현재도 꾸준하게 노력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고민에 대한 뻔한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 오늘도 역시나 친한 친구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감정받이의 감정받이, 정신과 상담사의 상담사와 같은 격이다. 그리고 사람 좋은 내 친구는 어김없이 말할 것이다. ‘이제 그만 놓아버려! 제발!’

무엇을 놓아줘야 하는지 굳이 말로 내뱉지 않아도 나도 친구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어려운걸. 아직까진 왼손이 하는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 만큼 내 마음이 넓지 못하나봐 친구야. 불안도 병인데, 개울가 만큼의 얕고 좁은 마음 또한 문제다.

세상과 내 마음은 참 어렵다. 하나를 해결하려고 하나면 하나가 또 문제다. 마치 양 손 가득 움켜쥐고 있는 모래처럼 자꾸 결여된 무엇인가가 쉴새없이 비어져나오고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니 또 잠 못 이룰 것 같은 불안이란 녀석이 슬그머니 다가온다. 지긋이 눈을 감고 딱 3분만 마음챙김을 해보려고 한다.


내가 이기적인 건 잘 알고 있지만. 딱 내가 느끼는 그 절반 만큼만이라도 타인의 수고를 알아주면 안될까. (설사 이타적인 목적으로 시작된 수고가 아닐지라도.) 내가 이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욕심인걸까. 풀기 어려운 숙제와도 같은 것들이 내 맘속에 가득 쌓여있는 기분이다. 어차피 다 하지 못할 숙제, 잠시 미뤄두고 잠을 청해야겠다. 깊게 생각하기에 오늘은 일요일 밤이 깊어져가고, 어느덧 월요일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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