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니타 Jan 03. 2018

유난스럽게 굴지 않기.

스물 여덟의 새해목표 계획기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큰맘 먹고 피부과에 들렸다. 센스있게 마지막날 만큼은 종무식을 한답시고 뷔페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가지는 것으로 퇴근을 시켜준 덕분에 시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올 봄부터 갑자기 눈 밑에 볼록하게 올라온 비립종 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장으로 가볍게 가려지는 정도더니, 내 거슬림을 야곰야곰 먹고 자라나 육안으로 자세히 보지 않아도 눈에 띄는 정도의 고민거리가 되고 말았다. 분명 피부과에 간다면 작은 레이저 시술 만으로 치료될 것이 분명했지만, 이 외에도 피부과 간호사님들의 현란한 영업멘트에 홀랑 넘어가 추가 결제를 하게 될 일이 생길까봐 미루고 미뤘다가 드디어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연말을 앞둔지라 진료 예약은 쉽지 않았고, 어렵사리 잡은 집 근처의 병원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이 비립종과 함께 내 근심거리 하나도 덜어내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보실게요.’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의사선생님은 돋보기인지 뭔지 모를 진료기구로 내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편평사마귀네요.’

비립종이라고 믿었던 그 돌기는 다른게 아닌 사마귀였던 것이다. 내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근데 많아요. 한 100개정도?’

엥? 하늘에서 날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백 개라니. 얼굴에 사마귀가 백 개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비립종이라고 믿었던 이 돌기가 무럭무럭 자라남과 동시에 얼굴에 좁쌀 여드름이 많아졌었다. 믿을건 피부결 하나 뿐이었던 지라, 피부를 되돌려 보겠다며 기초화장품을 바꾸고, 7스킨법인지 뭔지 모를 기초법도 바꾸어보고, 매일 팩을 하고, 그렇게 노력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그 트러블들은 좁쌀 여드름이 아니라 모두 사마귀였던 것이다. 정말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의사선생님은 이 나이 때의 여성분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바이러스성 질환중에 하나고, 본인도 사마귀가 있다면서 피부를 보여주었으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사마귀 바이러스의 보균자들은 레이저 치료를 하더라도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남에게 옮길 수도 있는 질병이기 때문에, 발견했을 때 몽땅 치료를 받고 가는게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진료대 위에 누워있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이미 내 손에 쓰디쓴 치료비 영수증과 마취가 풀리지 않아 얼얼한 벌통같은 내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모든 의욕이 탁 풀리면서 비춰지는 얼굴에서 뿜어나오는 못생김의 아우라에 고개는 절로푹 숙여졌고, 약속되어 있는 친구와의 저녁식사 자리에도 가기 싫어질 정도였다. 울며 겨자먹기로 만난 친구는 깔깔 웃으며 너무 시무룩해 하지 말라고, 큰 병이 아니니까 다행이지 않냐면서 위로했지만. 내가 정작 속이 상한건, 비싼 치료비나, 벌써 딱지가 앉기 시작한 못생긴 내 얼굴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2017년. 한 해 나는 자존감이 참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몇 번이고 낙방한 끝에 힘들게 붙은 자격증 시험. 호기롭게 입사했던 회사에서의 낙오. 자꾸 탈락되는 이직 서류. 자꾸만 길어지는 연애 공백기. 점점 찌는 살. 자의든 타의든 혼자 남겨지는 삶.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를 갉아먹는 일들은 계속되었고, 숱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남들보다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살아왔다는 사실 하나였다.

철썩같이 믿었던 내 마지막 자부심에 입혀진 타격은 생각보다 컸다. 철썩같았던 나의 믿음은 건강악화와 스트레스라는 요인으로 피부에 적나라하게 배신당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새해를 맞이한 지금까지, 남들은 사랑하는 사람 또는 친구 혹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기대감에 부풀어 새해를 위한 목표와 다짐을 세우느라 바빠보였으나.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이렇게 내 마음을 풀어서 적어본다.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프로폴리스를 장바구니에 담아 구매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했다. 세상에 자만할 것은 없다고.

좋아진 세상 덕에 말 그대로 로켓스럽게 배송온 영양제의 알약을 삼키면서 또 한 번 생각했다. 유난 떨지 말고 차분한 한 해를 보내야겠다고.


그래서 돌고 돌아 나의 올해 계획은. 내 특유의 꾸준함이라는 장점을 앞세워서 꾸준하게 유난떨지 않아볼 예정이다. 나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잔잔하지만 유속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간이 그러하듯이 흘러가면서 살아보려 한다. 다이어트 라는 거창한 계획 앞에서 일주일 만에 무너져 늦은밤 야식을 시켜먹는 짓 따위는 하지 않으련다.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며 무리해서 등록한 토익시험에 내 피같은 돈을 기부하지도 않으리라.

자만에 빠져 자잘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달성에 대한 압박이 나를 좀 먹어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미달성에 대한 좌절감도 클테니 말이다.


2018년이 이제 막 시작했는데, 너무 소극적으로 한 해를 맞이하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도 있음직하다.

다만, 덤비고 싶지 않다. 거창한 목표 앞에서 성취해가고 있는 내 발자취 하나마다 우쭐댈 스스로의 자만심도 견디기 힘들고, 하나도 온전하게 선 긋고 달성을 하지 못한 위시리스트 앞에서 가혹하게 채찍질 하기도 싫다.

동요 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은 참 힘들다. 하지만 시도해볼 것이다. 조용하게 나만의 길을 걸으며 흘러가듯 살아볼 것이다. 그 안에서 소소하게 무언가가 이뤄지기를 작게나마 바래본다.


결국은 보기싫게 딱정이가 졌던 내 피부도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뽀얗게 올라오는 새살과 함께 평소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이다. 다만 그 사이의 시간이 견디기 힘들 뿐이다. 견딤의 미학과 우쭐거리지 않기. 나의 2018년도는 새삼스럽게 굴지 않기 를 목표로 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 돌려받길 바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