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다로 향하는 길목

잔잔의 열한 번째 단어: 이름

by 잔잔 janjan



다 자라고 나서야 이름을 좋아하게 됐다.

어렸을 때는 동명이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당시에 유행하는 그런 이름은 아니었다. 동명이인의 시인 이름에서 가져왔다는 아빠의 말에도 크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한자로 써도, 한글로 써도 예쁜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이름에 ‘ㄹ’이나 ‘ㅈ’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렇다고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 싶을 만큼 내 이름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이름을 달고 살았다.


내 이름에는 바다가 있다. 바다처럼 어진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고 한다. ‘어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착하다? 마음 씀씀이가 넓다? 지혜롭다? 현명하다?... 바다를 생각하면 두려웠다. 바다는 너무 넓고 크고 깊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 손 쓸 힘도 없이 천천히 나를 가라앉힐 것 같았다.


바다를 좋아하게 된 건 몇 년이 채 되지 않는다. 여전히 깊은 바다를 생각하면 무섭지만 스무 살 이후에 바다에서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들어서 두려움이 많이 상쇄됐다. 바다도 여러 모양을 띄니까. 칠흑 같은 어둠부터 바닥까지 다 보이는 얕은 바다, 거기서 들려오는 철썩거림, 점점 소금기가 느껴지는 경계까지 다 바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물은 모두 흘러 흘러 바다로 들어가잖아. 물은 무섭지 않으니까 바다도 무섭지 않아.

어릴 때부터 언젠가 타투를 하고 싶었다. 내 몸에 오도도도 나 있는 주근깨 말고 예쁜 그림을 새기고 싶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물이 흘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물에 관련된 도안을 검색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1. 둥둥 떠 있는 작은 섬과 그 위에 야자수 한 그루 2. 물방울 모양, 어딘가에 갇혀 있는 물



일단 바다에 관련된 도안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열에 아홉은 바다의 한가운데였다. 나는 헤엄치는 법도 모르는데 냅다 새카만 바다를 몸 안에 욱여넣을 용기가 없었다. 섬도 싫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나무를 기를 수도 없다. 물방울 모양은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어딘가 흘러가는 ‘그런 느낌’이 안 왔다.

엄청난 의미를 담고 하는 타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었다. 나무가 쭉쭉 자랄 수 있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흐르는 물을 찾고 있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마음에 드는 도안을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꼭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게 아니니까’라는 생각에 때때로 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버렸다. 가면 어떻게든 영어를 쓰겠지, 어떻게든 친구를 사귀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매일 밤 뒤통수에 주먹질을 한 대씩 날려줬다. 영어도 안 되고, 외국인 친구들은 먼저 다가가지 않는 이상 절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나만 룸메도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와 별 다를 바 없는 밤을 보내며 핸드폰 불빛에 의존해 잠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급전개의 연속... 평소에 팔로우하던 작가님의 도안 중에 너무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내가 원한 게 모두 다 들어있었다!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흐르는 물, 길, 흐름. 예정 상으로 한국에 돌아가려면 4개월 정도가 남았지만 다른 사람이 예약할까 봐 나보다 열네 시간 이른 시간을 살고 있던 작가님께 얼른 디엠을 보냈고, 앞에 예약한 분이 왠지 모를 이유로 취소해주셔서 이다음 계절에 타투를 새길 약속을 했다.



나는 물이 흐르는 모양이라고, 반짝이는 저기로 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몸에 얹은 그림인데, 뱀 같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다. 그래도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바다가 조금 많이 더 좋아졌다. 2018년에 제19회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포스터를 사러 갔을 때 <빛나는 물체 따라가기>라는 영화의 포스터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괜히 그 의미도 집어넣어 본다. 나는 반짝이는 저기로 가고 있지. 내 이름을 몸에 새겼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흘러가고 싶다.

바다로 향하는 길목에 서있다. 아직 바다처럼 크고 넓지도 못하고, 여전히 아리송한 ‘어질다’는 말에 부합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흘러 흘러 바다에 닿을 거라는 생각으로. 나는 끊임없이 바다로 향하고 있다. 모든 걸 다 품을 수는 없어서 일단 흐르는 대로 향하기로 했다. 언젠가 정말 바다와 같은 사람이 될 거야.



by.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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