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열한 번째 단어 : 이름
<살짝 특이한 이름으로 살아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을 묻는 질문에 숨을 살짝 들이마시고는 한 음절씩 최선을 다해 말한다.
"권. 순. 수. 요."
"준수요?"(잘못 듣는 경우 90% 정도는 준수라고 듣는다)
"아니요, 순! 수! 요." (최선을 다해 발음한다)
"승수?"
"아니요. 순!!! 수!!!" (조금 화가 묻어나기 시작)
"아~ 순수하다 할 때 순수?"
"네 ^^"
뻔하디 뻔한 이름을 묻는 질문에 사실 나는 언제나 살짝 긴장이 된다.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사람들이나 알아듣고도 왠지 모를 흥미로운 발견을 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름이 진짜 예뻐요!" 하는 칭찬 혹은 "이름이 순수면 순수한가 허허허", "별로 안 순수한 것 같은데~" 하는 구린 그들의 유우머, 혹은 이름에 대한 여러 궁금증들이 동반된다.
"무슨 뜻이에요?" "한글 이름인가?" "누가 지어주셨어요?" "동생 이름은 뭐예요?"등등등.
이름이 예쁘다는 말은 우리 엄마 아빠의 작명 센스 칭찬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이름과 관련한 질문들은 어색한 상대방과 대화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기본 아이템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저런 종류의 유우머에는 도저히 웃어줄 에너지가 남아나지 않았다. 하하하. 하고 세 번 정도 웃어 줄 기력은 십 년 전에 바닥이 났다. 매 새 학기마다 반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의 아이스브레이킹을 위한 희생양이 되어 학창 시절을 보냈더니 이제는 그저 "ㅎ..." 하는 성의 없는 반응만 출력될 뿐이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한다.
'내 평생 이름이 권순수였는데 저런 유우머 처음 들어봤을 것 같냐고요!!!'
이름을 묻고 답하는 일은 살면서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이젠 어느 정도 반응들을 즐기곤 한다. 하지만 가끔 정말로 피하고 싶은 상황들을 마주한다. 바로 카페 계산대 앞에서 내 이름을 말하는 일이다. 사람이 많아 시끌시끌하거나, 내 뒤에 줄지어 사람들이 서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름을 묻고, 주문 번호 대신 이름을 부름으로써 고객과의 더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하고자 하는 그런 카페의 의도와 방침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계산대를 넘어 정확한 발음으로 한 번에 내 이름을 전달하는 것은 이름이 특이하고 목소리도 작은 나에게 은근히 꺼려지는 일이다. 물론 내 성격이 파워 내향 인간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말이다. 시끄러운 카페에서는 일치감치 포기하고 발음이 쉽고 편한 민지나 지연 같은 가짜 이름으로 (민지 씨 지연 씨 죄송합니다..)로 주문한 적도 있다. 이름 세 글자 한 번 더 불러주는 게 뭐 대수라고 거짓말까지 하는 건가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서도 왠지 입술에 힘주어 다시 말하는 상황이 난 그렇게 뻘쭘할 수가 없다. 피하고만 싶다.
그치만 순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사는 게 그리 나쁜 점만은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이를 먹은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좋은 점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이 내 이름을 잘 기억하는 것, 초면에 써먹을 영구적인 대화 아이템이 존재한다는 것(특히 어른들과 대화할 때 백 퍼센트 소환되는 단골 소재다) 그리고 종종 사람들에게 내 이름의 뜻에 대해 설명할 일이 생긴다는 것.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의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것이 그리 흔한 상황은 아니니까 말이다. 같은 질문에 질릴 때도 있지만 나는 이름 뜻을 묻는 질문은 내심 반갑기도 하고 그렇다.. 덧붙이자면, 내 이름은 순수할 순(純)에 물 수(水) 자를 써서 '깨끗한 물'이라는 뜻이다. 깨끗한 물이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것처럼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엄마 아빠의 (거창한) 뜻이 담긴 이름이다.
살면서 이름을 묻고, 답하고, 소개하고, 불리고 또 구분되는 일은 살면서 수도 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이다. 나에게 붙어있는 '순수'라는 이름 때문에 앞에서도 잔뜩 언급했던 것처럼 이름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많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 이름'이란 것에 따라오는 감정이나 의미 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더 단단해진 느낌이 든다. 요란하게 싸우고 요란하게 화해하는 친구들의 우정이 더 오래가는 것처럼, 그런 시간들을 지나온 서로가 더 특별해지는 것처럼 나도 내 이름 석자가 이제 꽤나 마음에 든다. 이름 때문에 더 창의적으로 놀림을 받는 어린애였을 때는 엄마 아빠를 살짝 원망도 해보고,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는 어른들 앞에서 눈알을 굴린 적도 많지만 말이다.
by.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