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속도에 대해

잔잔의열세 번째단어 : 죽음

by 잔잔 janjan


처음 화장터에 가본 날이었다.



큰 종합병원 옆에 마련된 깔끔하고 넓은 전문적인 화장터였다. 앞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있어서 고속버스 같은 장례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있었고, 널찍한 건물 로비의 대리석 바닥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여기가 화장터라고? 사실 나는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화장터 하면 왠지 모를 흙냄새를 연상하곤 했다. 붉은 흙이나 나무 조각 같은 것도 살짝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근거 없는 상상 속과는 너무나 다르게 그곳에는 흙냄새나 나무는 무슨 청소 용액의 깨끗한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화장은 2층의 작은 방 같은 곳에서 진행되었다. 건물 2층 중앙에 세네 개의 두꺼운 은색 문이 달린 방이 일렬로 자리 잡고 있었고, 문에는 작은 유리 창문이 달려있었다. 그 창을 통해 안에서 화장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문 위에 달린 작은 전광판에는 누가 그 안에 있는지 번호로 표시되어 있었다. 마치 은행이나 병원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붉은빛이 나는 검은 전광판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서 있었다. 두꺼운 문 넘어 직원들이 시신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작은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띵동- 000 유가족 분들은 유가족 대기실에서 대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은행 같은 전광판에 이어 은행 같은 띵동 소리와 녹음된 음성이 복도에 울렸다. 중앙의 화장터 양 옆으로 줄지어 자리 잡은 작은 방들이 유가족 대기실이었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은 아무 가구도 없는, 심지어 문도 없는 이상하고 깨끗한 흰 방에 들어앉아 죽은 누군가가 화장되기를 기다렸다. 띵동, 안내 소리를 따라서. 몇은 대기실 안에 앉아있었고, 몇은 복도에 나와 서성댔다. 그곳에 모인 나의 먼 친척들은 조용했고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 사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화장은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화장터의 잘 조직된 시스템이, 녹음된 음성과 띵동 소리가, 군더더기 없는 빠르고 효율적인 일 처리가 나를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흙냄새를 떠올렸던 내가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 시간 동안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신기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놀랍기도, 충격적이기도, 살짝은 허무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조용하고 효율적인, 하지만 여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던 그 공간에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열심히 고민했다. 바보같이.



증조할머니는 90살이 넘으셨었다. 할머니는 청산도라는 남해의 외딴섬에서 혼자 지내셨는데, 그 섬은 작고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여름 햇빛이 너무 강해서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나고 자란 곳이고, 할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의 묘가 있는 곳이기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몇 년에 한 번씩 섬에 가곤 했다.


처음 보는 넓은 콩밭이 있었고 끝이 안 보이는 갯벌이 있었다. 무릎 높이의 물이 200m쯤 펼쳐져있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해변도 있었다. 바다 끝으로 계속 걸어가도 깊어지지 않았다. 새벽에 수탉의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깰 수 있는, 우물이 있는, 걷는 거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는 곳. 밭 옆에 난 좁은 길에 돌담을 조심하며 주차를 해야 하는 곳, 연두색 뱀과 도마뱀을 볼 수 있는 곳.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slow city)로 등록되면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게스트 하우스가 몇 개 생기고 커다란 관광버스가 페리를 타고 들어오기도 했지만 너무 먼 탓인지 너무 슬로한 탓인지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그 섬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내셨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오셨을까, 하고 당신의 세월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 그보다도 주제넘게 돌아보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90년과 1시간, 90년과 1시간. 그 차이를 계속 생각했다. 서울에서 완도까지 차를 타고 여섯 시간,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배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했다. 속도에 대해 생각했다. 할머니가 오랫동안 지내셨던 그 느린 섬에 대해 생각했다. 화장터의 군더더기 없는 알림 소리가 띵동 하고 울려 조금 슬퍼졌다.


by.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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