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스무 번째 단어: 빛
덥고 습하고 흐려
뭔가를 해보려는 날은 꼭 이런 식이다.
불평을 늘어놓을 거리는 차고 넘쳤다
‘배경이 이상해’
‘자연광이 안 들어와’
‘어디 능소화 활짝 핀 곳 없나’
…
꿍얼꿍얼꿍얼 거리는 사이에 한 롤이 끝났다.
"하이고 슬퍼서 입맛이 없다…"
마음처럼 일이 안 풀리면 먹는 것도 고되다.
입맛은 없었지만 웬걸, 평양냉면은 너무 맛있었다.
“더우니까 빙수 먹자”
“빙수 좋다”
...
“인절미 망고 치즈 이런 것 말고 옛날 팥빙수!”
동시에 말하니 웃기다.
오늘 같은 날은 옛날 팥빙수지, 대신 제리(젤리 아님)는 너 다 먹어
있잖아,
필름 카메라의 원리는 나도 잘 몰랐는데 필름은 빛에 아주 민감한 약품을 얇게 펴 발라놓은 테이프라고 생각하면 된대. 필름에 빛이 닿으면, 약품이 반응하고 그 흔적이 남는 거라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수가 다 녹아버리기 전에 사진이 도착했다. 참 빠른 세상이야.
도통 어떻게 찍혔는지 모를 필름을 기다리는 일. 한 장 한 장 아까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들이밀었던 낮 시절. 왜인지 잘 나올 것 같던 사진은 현상해보면 형체 없고 되려 언제 찍은지도 기억나지 않는 풍경이 마음에 쏙 든다.
잔뜩 날씨 탓을 한 하루였다. 볕이 예쁘게 들지 않으니 빛을 기록하는 일이 퍽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흐린 날, 덥고, 습하고, 나무들도 왠지 주눅 들어 보인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이렇게나 있었네. 물론 세 장 중 하나는 새카맣게 나와서 뭘 찍은지도 모르겠지만, 흑과 백 사이에는 얕고 깊은 빛이 고였다.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