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친구들이 건넨 잔 <짠> 01
[ 우리의 친구들이 건낸 잔, 짠! ]
<짠>은 우리가 선택한 단어에 대한 친구들의 답장입니다. 친구들이 각자 완성해준 소중한 글을 담았습니다! 우리의 잔이 마주쳐 짠! 하는 소리가 난답니다. 언제든 답장을 보내주세요. 짠!
< 이름의 의미 >
나의 이름은 지영, 지혜 지에 헤엄칠 영 자를 쓴다. 헤엄칠 영이라니. 이름에 없었다면 평생 모르고 지났을지도 모르는 한자다. 학급에 한 명 꼴로 있는 흔한 이름과 달리 특이한 한자를 쓰는 것이 나는 괜히 특별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헤엄친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면서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여러모로 모순적인 이름이라 어떻게든 죽기 전까지 수영은 꼭 마스터해야지 하는 혼자만의 버킷리스트도 있다. 물론 아직은 개헤엄과 점점 가라앉는 배영 정도가 나의 전부이지만!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다. 지혜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뜻이라나.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지혜의 동음이의어가 ‘공부 잘하는 것’이라는 건 자라면서 점점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댁에 가면 할아버지는 항상 나를 위해 신문 스크랩을 해놓곤 하셨는데, 그 내용은 주로 ‘로스쿨 현황’, ‘로스쿨을 나오면’ 따위였다. 어렸을 때부터 넉살이 좋았던 나는 네네 갈게요 하며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곤 했고 머리가 커지면서는 저는 저만의 꿈이 있어요 하고 그의 기대를 쉽게 무시해버렸다. 그렇다. 나의 이름에는 그의 소망이 담겨있었다. 지혜 있게 자라길 바라는 그의 소망. 지혜로운 손녀딸이 성공해서 좋은 삶을 살길 바라는 그의 소망.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소망이다. 나의 성공이 할아버지께 어떤 득이 된다고 그렇게 나의 성공을 빌어 주셨을까. 맹목적이고 큰 사랑을 담은 이상한 소망. 하지만 그런 소망이 담긴 나의 이름은 지난 26년 간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불러졌고 소망이 능력을 발휘한 건지 나는 나름 현명한 사람으로 자란 것 같다.(주관적인 기준이지만) 문득 이름에, 이름이 가진 의미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나를 대표해서 타인에게 불려지고, 쓰이며 힘이 생기고, 무의식적으로 나는 이름의 의미를 지향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이름의 무게가 실감 났다. 나중에 자식이 생긴다면, 반려 동물이 생긴다면 어떤 이름을 지어줘야 좋을지 벌써부터 머나먼 일의 고민을 당겨하고 있다. 아직 누군가의 이름을 지어줄 상황은 없으니까 대신 누군가의 이름을 보다 소중하고 힘 있게 불러줘야겠다는 결심이 든다. 그 사람의 이름만이 가진 의미를 곱씹으며, 그 사람만의 이름이 내는 소리를 즐겨보며, 그 사람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의 지극한 사랑을 감히 짐작해보며 큰 소리로 불러줘야지. 내가 평생 불려 갈 이름을 내가 짓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그 이름을 붙여준 이의 사랑을 평생 불려지며 누리라는 뜻이 아닐까 괜히 의미를 부여 해본다.
언젠가 이름 대신 누군가의 엄마, 언니, 또는 직장의 직급으로 불려지는 것이 더 많아지는 날들이 온다는 게 슬퍼진다. 살면서 엄마나 할머니의 이름을 직접 불러본 적이 손에 꼽히는 것 같아서. 그러니 이름 불릴 일이 많은 지금 주변의 이름들을 더 힘 있게 불러봐야지.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이름과 같은 삶을 살아가길 빌어줘야지. 그들의 이름에 나의 소망도 조금 곁들여 담아봐야지. 아빠 생각이 난다. 우리 아빠 이름엔 ‘별 성(星)’자가 들어간다. 그래서 아빠는 이렇게 일찍 하늘의 별이 된 건가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별처럼 빛나게 흐르고 있기를. 그곳에서 별처럼 우리를 지켜봐 주기를. 사랑을 담아 아빠 이름을 소리 내 불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