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스물한 번째 단어: 게임
글 읽기 전 오늘의 bgm
https://youtu.be/FytS4Whw-DQ
Cyber Holiday : in 040 island
by.040
언니와 오빠가 하는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앙큼한 막내는 어렵사리 컴퓨터 자리를 얻어봤자였다. 오빠가 태권도 학원에서 돌아온 후 말한다. ‘야 비ㅋ....’ 비키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엉덩이가 가볍다. ‘이제 오빠 해라~’ 선심 쓰듯 비켜주는 가벼운 엉덩이의 소유자, 그 덕에 우리 집은 형제간 컴퓨터 쟁탈전에선 자유로웠다.
오빠를 따라 만든 메이플스토리 캐릭터만 네댓 개 되나? 그치만 레벨 20을 넘긴 적이 없다. 몬스터 잡다가 죽으면 유령이 되어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싫었고, 똑같이 생긴 몬스터를 열 마리, 스무 마리 잡아야 보상을 주는 것도 귀찮았다. 복 받은 내 캐릭터들은 게임 접속 후 쪼랩(?) 몬스터 두어 마리를 잡으면 바로 상점행이었다. 상점에서 이것저것 입혀보고, 새로 나온 캐쉬템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오빠가 이번엔 영어학원에서 돌아온다. ‘야, 비ㅋ...’ 역시나 엉덩이가 가벼웠다.
앞의 글만 보면 게임을 전혀 즐기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다. 내가 꾸준히 했던 몇 안 되는 게임은 아이폰 4를 썼을 때 했던 스머프 빌리지, 심즈, 심슨 빌리지였다. 이런 게임들은 몬스터를 잡을 필요도 없고 최소한의 룰 아래서 내 맘대로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 메이플스토리를 할 때도 허구한 날 상점에서 옷만 입히다가 나오는 애한테는 이런 게임이 딱이네 하고 나도 여러분도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쿠킹마마, 마리오 같은 닌텐도 게임도 참 좋아했지만 게임 좋아하는 아들의 동생에게 게임기를 사줄 턱이 없었다. (한 명 사주면 다른 한 명도 사줘야 하는 맞벌이 부부의 고민도 있었겠지) 정말 드러누워 졸라봐도 소용없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아빠가 닌텐도 스위치를 선물해줬다. 나뿐만 아니라 서른한 살의 언니에게도 사줬다. 다 커서 무슨 게임기야..?라고 딱 3초 동안 부끄러워하곤 바로 중독의 길을 걸었다. 그래 이 집에서 나만 게임을 싫어할 리 없어, 이제야 발현된 거야. 어릴 적에 친구들이 동물의 숲 이야기하고, 자기들끼리 통신할 때 얼마나 서러웠던가! 그 설움을 이제 영영 털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한창 닌텐도 붐이 일어나던 코로나 시국 초반이어서 그런지 통신할 수 있는 친구도 많았다. 언니네 섬에서 과일을 받아오고, 그 과일들을 잘 키워서 친구에게 나눠주고, 무를 팔러 가고 무를 사러 왔다. 아빠가 괜히 사줬다 싶을 정도로 대출을 모조리 갚아낼 때까지 닌텐도를 했다. 생각보다 빚, 금방 갚더라! 현실과 참 다르지만 현실 같은 이 세상이 편했다.
그렇지만 나는 현실에 살고 있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동물 친구들을 꼬드겨 섬에 이주시켜놓고 나는 몇 개월씩 자리를 비웠다. 그래도 내가 돌아오면 언제나처럼 반가워해주는 귀여운 동물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현실에 있는 내 친구들 생각이 나기도 했다. 며칠 전 5개월 만에 ‘게임’에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접속했더니 동물 친구들뿐만 아니라 집 안에 바퀴벌레도 날 반겨준 건 좀 별로였지만... (은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징그럽다. 밟으면 아작! 소리가 난다.)
섬은 내가 사는 북반구와 시간도, 날짜도, 계절도 같다. 거기도 여름이라 해가 조금 길어진 것 같고, 구름은 낮게 깔리고 그 아래에 왕잠자리가 날아다니는 나의 섬. 여름을 참 사랑하는 나와 우리를 이 섬에 초대해보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혼자 원맨쇼 하느라 또 밤새 게임기를 붙잡고 있었지만 친구들처럼 꾸며놓은 캐릭터를 보니 오늘조차도 그리워졌다.
(친구가 엄청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친구들을 만들지 못해서 미리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동물의 숲에서 구현할 수 있는 친구들 위주로 꾸며보았어요.)
깊이깊이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DD에겐 당연히 수영복과 스노클링 물안경을 주었다. 바닷가에 비치타월을 놓고, 우리가 언젠가 탔던 서핑보드도 놓고, 수영하다 배고파지면 먹을 간식과 복숭아도 놓았다. 또 물에 빠진 나를 구할 때 필요한 튜브도 놓았다. 물속성 친구들에게 코로나는 조금 더 가혹한 것 같아서 심심한 위로와 함께 꾸며보았다.
최근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졸업한 친구 S를 위해 졸업식을 준비했다. 코로나로 인해 가운 대여 사업도 잠정 중단되어서, 학사모도 못 쓰고 졸업해버린 S에게 바친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동물의 숲의 박물관이 모교의 본관과 매우 비슷한 모양이었다. 부엉이 관장님 덕에 더 친근했달까.. 노란 장미의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완벽한 성취’였다. 우리의 5년이 모두 충실한 시간이었길 바란다. (사실 노란 장미꽃이 가장 많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사족을 붙여봤다.) 가장 먼저 졸업을 축하해
새 집에서 자취를 시작한 J 언니, 첫 자취는 아니지만 새 보금자리에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길 바란다. 보송보송한 침대 위에서 뒹구는 한가로운 저녁을 보내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한 Y에겐 당차게 견디고, 돈 많이 벌라는 의미에서 돈나무 아래에 세워봤다. 멀디먼 출퇴근길이 고될 테니 건강을 꼭 유의하길 바란다.
간호사인 친구 C에겐 휴일이 딱히 없다. 매달 짜인 스케줄대로 일하는 애한테 게임 속에서도 간호복을 입혀놓아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배경도 열심히 꾸몄다는 점을 감안하여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꾸벅꾸벅 나이트 때 졸고 있을 (그치만 사실은 열심히 일하고 있을) 친구를 떠올렸다.
내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밥을 먹고, 주변을 꾸미고 가꾸고, 그리고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곳. 보스 몬스터를 잡을 일도 없고 화려한 직업으로 전직할 일도 없는 평범하고 평화로운 세상 속에서 잠시 착각할 수 있는 게 마음에 든. 우리 모두 현실이 조금씩 팍팍하겠지, 이번 여름은 마냥 덥기만 한 것 같고 말이야. 그래도 이 섬에선 다들 잘 지내고 있었으니 마치 내가 정말 쉬다 온 것처럼 잠깐 착각해보았으면 좋겠다. 게임 속에서 나와도 그 안에서는 영원히 cyber holiday!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