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세 번째 단어 : 사진
좋아하는 게 많은 나에게 누군가 ‘취미가 뭐예요?’라 물었을 때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하나 있다.
“저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중학교 1학년이 끝날 때 즈음 내 인생 첫 카메라를 샀다. 그 시절엔 핸드폰 카메라의 화소가 높아봤자 200만 화소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뿌옇고 흐리멍덩한 사진의 모퉁이에는 항상 아쉬움이 묻어있었다. 당시 나는 한 달에 3만 원가량의 용돈을 받았는데, 그걸 몇 달이고 아끼고 아껴 40만 원 정도를 모았다. 네이버 지식인을 열심히 뒤져가며 찾았던 내 장바구니 1순위 카메라는 캐논 DSLR 이였다. 그러나 한 달 용돈 3만 원이 고작인 중학생의 주머니 사정상 가당치도 않았다. 돈을 더 모아서 캐논을 사고 싶었지만 나는 그리 참을성이 있지 않았고, 엄마한테 졸라볼까도 싶었지만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그런 맹랑한 중학생이었다.
여느 주말과 같이 엄마 아빠와 누워서 개그콘서트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아빠는 TV를 볼 때 어느 채널에 정착하지 못하는 요상한 습관이 있는데, 뭐 좀 보려고 하면 채널을 휙휙 돌려버리곤 하는 거다. 그러다가 어느 홈쇼핑 채널에서 아빠의 손이 멈췄다.
“햄아(*아빠가 나를 부르는 애칭), 저거 어때?”
아빠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DSLR처럼 생긴 카메라가 있었다. 올림푸스 하이엔드 카메라였다. 하이엔드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디카보다 좋고(?) DSLR보다는 싼 그런 카메라 정도로 보였다. 당시 내 예산인 최대 40만 원을 조금 밑도는 가격이었다. 이제 막 중2가 될락 말락 한 나의 십 년 조금 넘는 인생에서 그렇게 큰돈을 한 번에 써본 적이 없었다. 한 밤중인지라 내 돈은 몽땅 통장에 들어가 있었고...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속시원히(혹은 마음대로) 결제해주었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난 생에 첫 카메라를 갖게 되었다. 예쁜 카메라 액세서리도 달고, 액정 보호 필름을 붙이느라 한밤중에 혼자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놀러 갈 때 이 짐 저 짐, 한 짐을 이고 가는 와중에도 꼭 목에 카메라를 달랑달랑 걸고 나갔다. 친구들이 신기해하거나 부러워하면 꼭 강조했다. “이거 내 돈으로 산거야!” 그러곤 사랑하는 내 친구들의 사진을 조각조각 모아 선물하길 몇 년이고 반복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하게도 내 카메라는 구모델이 됐다. 친구들은 하나둘 최신식 카메라를 장만해 나타났다. 화면도 돌아가고, 셀카 기능도 있고, 엄청 예쁜 하얀색(!!!)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너무 부러워서 잠깐 내 카메라가 싫어지기도 했다. 충전도 안 되고 매번 AA 건전지를 네 개나 사서 넣어야 하는 점을 이제야 싫어하게 된 나를 보면서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신처럼 지니고 다닌 카메라는 한 번 크게 망가져기도 하고, sd카드를 몇 번 잃어버리기도 했다. 온갖 수모를 다 겪은 내 첫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이제 몇 장 남아있지 않다. 1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을 잘 보관하지 못한 내 탓이 크겠지만.
사진은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봄이다. 학교에 심어져 있는 나무의 7할 정도가 벚나무인 우리 학교는 봄에 가장 아름다웠다. 낙엽만 굴러가도 배꼽 빠지게 웃는 고등학생들에게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학창 시절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친구들을 모아 교무실에서 귀찮아하시는 담임 선생님을 끌고 나와 단체사진을 찍기도 하고, 점심시간 급식실 가는 그 잠깐의 길에도 카메라를 챙겨 꽃과 나무와 사람들을 잔뜩 담아냈다. 집에 와서는 교복을 벗지도 않고 파일을 컴퓨터에 옮겨서 할 줄도 모르는 포토샵으로 색 보정을 하고 단톡 방에 보내면 몇몇 친구들은 자기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두기도 했다. 사진을 찍었던 수많은 순간들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고2 때 이후로 이 카메라를 쓴 일이 없다. 얼마 전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고 새 건전지를 넣어 괜히 한 번 켜봤는데, 2020년대에 보니 뭐랄까나...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왠지 장난감 같았다. 당시엔 최신식이었던 이 카메라 이후에 내겐 세 대의 스마트폰과 한 대의 디지털카메라가 쥐어졌지만, 저때와 같은 마음으로는 다신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만 같다.
by.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