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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anjan Nov 23. 2020

04. 나는 뭐하는 인간일까 (feat.mbti)

잔잔의 네 번째 단어 : mbti


올해 초 mbti테스트를 시작으로, 11월 말인 지금까지 온갖 성격테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유행이 사그라들지를 않고 있다. 5분에서 10분 남짓한 시간동안 간단한 질문들에 답변을 하면 나의 성격 유형을 다섯 가지 알파벳의 조합으로 설명해준다. 이런 단순한 조합이 어떻게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간 내면의 모습을 정의하느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성격테스트는 영 못미더운 구석이 있더라도 나조차도 모르겠는 나의 내면의 한 조각을 설명해주는 시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이런저런 테스트를 하고 주변 사람들은 무엇인지 기웃대는 것은 꽤나 재밌다. 




나의 성격 유형은 infp



나의 mbti는 infp (열정적인 중재자)이다. 고등학생 시절 mbti테스트를 처음 해봤던 때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다시 해봐도 이것만 나온다. 최근에 한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의 mbti를 맞춰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결과는 지금까지 정답률 약 99.9%. 다른 사람들 것은 틀려도 내 mbti는 귀신같이 잘들 맞춘다. 나의 주변인들은 내가 infp 그 자체라고 말한다. 



저 초록색 인간이 꽃을 들고 걷는 모습조차 꼭 날 닮았다고 그랬다. 흐느적 흐느적 앞은 보지도 않고 걷는 게 나랑 똑같다고. (언젠가 동영상 속 내가 걷는 모습을 보고 좀 놀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오징어처럼 걷더라고...) 백이면 백 나의 성격유형을 단번에 맞추는 이들을 보며 나는 정말 간파당하기 쉬운 인간인가 하며 분하면서도 웃겼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해파리가 된 것 같았다. (feat. 보건교사 안은영) 지금 생각해보니까 흐물흐물 돌아다니는 것도 비슷하다. 



근 몇 달 동안 mbti는 나 포함 나의 친구들 사이에서 굉장히 자주 등장하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였는데, 어떤 상황에서 각기 다른 리액션을 보였을 때 "아 얘 T라서 그래” 혹은 "역시 이 자식은 극강의 F다.” 이런 식의 말들로 끝없는 mbti 분석 토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모순덩어리인 인간의 성격을 간단히 16개로 분류한데다가, 나는 어떤 인간이고 너는 어떤 인간인지를 깔쌈하게 설명해준 mbti라는 것은 좀처럼 지겨워지거나 시들해지지 않는 주제다. 



고민하는 농담곰


‘나는 뭐 하는 인간인가 그리고 쟤는 뭐 하는 인간인가’ 이 질문은 죽는 날까지 계속 될 천 년의 궁금증이다. 도대체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건지 수 없이 고민해도 뾰족한 답은 없다. 그래서 조금 허접한 구석이 있는 성격테스트라고 할지라도 흥미롭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나의 성격 혹은 내면이라는 것은 손에 쥐고 꺼내 찬물에 빡빡 씻어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니 어떤 일관된 취향이랄지, 일관된 태도로 그걸 설명해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듣는 음악이, 좋아하는 영화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책의 한 줄 한 줄인 것마냥 행동했다. 나는 종종 그 책의 한 문장들이 다시는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집착하는 짓을 하곤 했다. 너 옛날에는 이런 거 싫어했잖아. 이제는 좋아하네? 하는 누군가의 말에 쉽게 부끄러워졌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습관이 하나 있다. 누가 어떤 말을 하거나, 새로운 노래를 들었을 때, 아니면 누군가 추천해준 영화를 보았을 때, “아 이거 내가 싫어하는(좋아하는) 스타일이야” 하고 단 순간에 선을 그어버리는 말버릇이다. ‘나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런 노래는 내가 즐겨 듣는 장르가 아니니까’하면서 과거에 나 스스로가 정의했던 나의 취향과 과거 내렸던 판단들을 재빠르게 곱씹어 본다. 그리곤 새로운 것을 빠르게 분류하고 쳐낸다. 내가 스스로 만들어왔다고 생각한 ‘나’를 또 그렇게 연결시켜나간다. 스스로의 알고리즘에 갇혀 내가 만든 좁은 세계에 갇혀있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언젠가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의 집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술을 먹고, 씻지도 않은 채 첫차를 타고 집에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정말 정말 싫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요상한 알고리즘이 판단해온 것과는 다르게 무지 재미있었다. 이른 아침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지금껏 내가 스스로의 이상한 알고리즘에, 문장들에 나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까지 온 지구를 때려 부실 것만 같은 강렬한 락만 들어왔다고 해서 친구가 추천해주는 귀염깜찍한 K-POP 걸그룹의 노래를 한 번도 틀어보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는 음식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메뉴를 시키지 않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과거의 나의 취향과 판단들은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전부는 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수정할 수 없는 책의 형태가 아니라, 언제든 올리고 내릴 수 있는 네이버 클라우드나 구글 드라이브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렴 지워지지 않는 문장들이라도 어떤가. 인간의 내면은 모순덩어리고 한날 한시를 가만히 있지 않는 유동적인 것인데. 



by. 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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