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의 네 번째 단어: mbti
mbti는…... 과학이지
코로나 시국은 일평생 스스로에 집순이 타이틀을 준 나조차도 진정한 집순이가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해 주었다. 타의에 의한 칩거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우리는 400번 저어 만드는 달고나 커피를 넘어서 천 번 저어 만드는 수플레 오믈렛까지… 그것을 시작으로 방구석에서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보는 2020년형 신인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던 mbti유형 검사를 찾아냈는데…
10분 남짓의 검사가 나를 특정 무언가로 규정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분 나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유희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유형화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 열여섯 가지의 성격 유형의 결과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조금만 내 상황과 비슷하면 미친 듯이 과몰입하고 나랑 안 맞는 것 같은 부분은 흐린 눈을 하고 보게 된다. 또 내 경우에는 주변에 mbti 과몰입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 나까지 덩달아 mbti를 신봉하게 되었다. 만날 때마다 mbti 얘기가 빠진 날이 없을 정도로 우린 과몰입 오타쿠들이 되었다.
내 성향은 몇 번을 검사해봐도 항상 ISFP였다. '오늘은 왠지 나 좀 지적이고 계획형 인간 같은데?'라고 생각해도 매번 똑같은 결과를 받았다. ISFP는 ‘호기심 많은 예술가’인데 정작 나는 호기심이 많지도 않고 예술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항상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부러웠고 예술가를 동경해왔다. 그래서 처음 mbti 검사 결과가 나왔을 때는 그저 나의 이상과 바람이 반영된 건가 싶었다. 그리고 이름이 간지 나서(?) 퍽 마음에 들었다. 검사할 때마다 같은 결과를 받으니 나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이젠 이름, 나이, 그다음으로 mbti를 말하게 될 정도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닌 것이 한동안 SNS에서 mbti 관련한 콘텐츠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중 ‘mbti별 팩폭’를 가장 재미있게 보았는데, 팩폭이라는 말 그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 자존심 상해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끝에 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었다.(질끈) 가장 공감 갔던 ISFP의 특징을 세 가지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일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다 미룸
이 말을 본 순간 팩트로 너무 두들겨 맞아서 3000원 비싸진 기분이었다.(최근 배운 신조어) 사진 속 글에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룸’ 이 말이 두 번이나 나올 정도로 ISFP들은 미루기형 인간인 것일까? 나는 미리미리가 잘 안 된다. 어떤 일이든 닥쳐야 불이 붙는 비효율적인 일처리 습관을 갖고 있다. 그…그치만…! 좀 게으르기는 하지만 일을 제대로 안 하지는 않는다고 변명해보고 싶다. 미리 안 한다는 것이 아예 일에서 손을 떼고 누워서 넷플릭스만 본다는 뜻이 아니다.(가끔 그럴 때도 있지만) 뭔가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대개 실패해서 일의 시작이 미뤄질 뿐이다. 나는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사는 인간이기에 ISFP의 수식어 중 이게 가장 하이퍼 리얼리즘이었다. 항상 더 잘 해내고 싶기만 한 걸요. 그게 일이던, 학업이던, 인간관계던… 나의 미룸은 욕심에서 온다. 시작할 때부터 100을 원해서 시작이 어렵다. 시작을 미루는 습관은 정말 고치고 싶은 부분이다.
2. 조용한 관종
소심하고 조용한 관종… 사람들이 나한테 관심 가져줬으면 좋겠는데 날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고 근데 또 나한테 신경 안 쓰면 서운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인간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안 쓰고 그냥 견디면 안 될까요..? 왕관은 갖고 싶은데 쓰고 싶지는 않아요. 뭐랄까.. 그냥 가방에 달랑달랑 달고 다니는 정도..? 무게는 견딜 수 있는데... 아무튼 참 복잡한 인간이다.
3. 갈등, 불화 싫어함
╭┈┈┈┈╯ ╰┈┈┈╮
╰┳┳╯ ╰┳┳╯
안 안
싸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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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 까
┈┈┈┈
면 요
안 싸우면 안 될까요..? ‘안 되면 되는 거 하자’, ‘그럴 수도 있지’, ‘음 그렇군’이 나의 기본값이다. 언제나 멋진 파이터를 꿈꾸지만 이루어진 적은 없다. 싸움에 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난 애초에 손익을 따지는 것에 무뎌서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화가 나도 멋지게 세계의 평화를 위해 눈 한 번 딱! 감고 넘어갈 수 있다. (두 번은 못 넘어감) 가끔 나의 이런 면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맨날 좋다고 해서 싫어하거나 혼자만 착한 척하는 것처럼 보여서 싫어한다. 변명하자면 나에게 가장 이기적인 방법은 가장 이타적인 것이다. 내가 온 마음으로 남을 대했을 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특성들은 왠지 그럴듯해 보이면서 살짝 기분 나쁘다. ’이.. 건.. 과학(science)이다(º﹃º )’와 ‘니...니가 몰 알아 (•̩̩̩̩_•̩̩̩̩)????' 사이 어딘가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런 건 그저 재미로 읽어야 하는데 또또 과몰입해서는 어떤 코멘트에 대해선 진심으로 기분이 상한다. 개인적으로 ‘E는 인싸 I는 아싸, S는 이타적 N은 이기적 T는 주관 뚜렷 F는 남 눈치 봄, P는 게으르고 J는 계획적’…이런 흑백논리에 기반한 분류는 좀 싫다. 이런 말을 보면 왜 나는 T나 J가 되지는 못하는지 생각하며 부족한 부분을 찾으려 하게 된다. 어째서인지 나를 대변해버리게 된 mbti가 나의 능력과 무능력의 평가지표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그래서 되도록 장단점같이 가치판단이 들어간 콘텐츠는 넘긴다. mbti로도 나를 설명할 수 있지만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니까. 뭐 본인만의 이상적인 mbti유형은 있겠지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닐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우리.
-이상, 과몰입 오타쿠 ISFP 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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