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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 janjan Nov 16. 2020

03. 사진의 근본 정조는 슬픔

잔잔의 세 번쨰 단어 : 사진


"그때는 그랬지"라는 시간적 내용이 바르트에게는 사진의 본질이다.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바르트에게 날짜는 사진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날짜는 삶, 죽음, 세대의 불가피한 소멸을 환기하고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투명사회 (한병철)



사진은 과거에 존재한 것에 대한 증서이다. 따라서 슬픔이 사진의 근본 정조가 된다. 이 문장은 책 <투명사회>의 한 부분이다. 오늘날의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짧게 들어간 내용이었지만, 이 짧은 문장을 읽고 나서 그동안 흐릿했던 나의 감정의 근거가 또렷해진 기분이었다. 



언젠가 파랗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인지 슬퍼진다고 휴대폰 메모장 한 바닥을 가득 채워 글을 써둔 적이 있었다. 작년 여름,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알게 된 사진작가 낸 골딘의 사진들을 보고 썼던 글이다. 좀 진부하고 MSG가 살짝 느껴지는 감동의 패턴이지만, (유럽여행 중 우연히 본 작가의 사진에 감명을 받았다니. 내가 봐도 조금 구라같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굳이 사진집이 있는 도서관을 찾아가 볼 만큼 찡했다. 



런던 여행 중에 테이트 모던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볼 게 너무 많아서 한참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낸 골딘의 작품을 보게 되었다. 큰 전시실 한 켠에 영상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한 좁은 공간이었다. 오래된 노래가 흐르는 어두운 전시실에서는 한쪽 흰 벽면에 낸 골딘의 필름들이 한 장씩 영사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알게 된 작가의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의 사진들, 다른 시공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슬퍼졌다. 오전 내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다리가 아팠는데도 몇 십분 동안 그 앞에 서있었다. 엄청 슬펐다. 이상하게도.


살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던 사진집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


짧은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그 사진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사실 기프트샵에서 너무 비싸고 무거워 한참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끝내 사지 못한 낸 골딘의 사진집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가 마음에 걸렸다. 역시 여행가서 살까 말까 하는 것은 무조건 샀어야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리저리 서치를 해보다가 안국에 있는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 내가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사진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장 친구를 꼬셔서 사진집을 읽으러 갔다. 두 번 읽었다. 


Picnic on the Esplanade, Boston 1973


사진집에는 낸 골딘이 오랜시간 동안 촬영했던 자신과 주변 친구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사람들은 파랗게 웃고, 투명하게 울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행복하고, 우울했다. 근데 가장 나를 슬프게 만드는 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그 순간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사람들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사진이 슬픈 건 이 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못 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순간의 소멸을 증명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선을 긋는다. 소멸이라는 단어는 뭔가 무섭기도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는 단어이지만 우리의 매일이, 매시간이, 매초가 쉬지 않고 소멸한다. 문득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은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유일무이한 시간이라는 사실에 잠깐 숨을 멈출 때가 있다.




* 내가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낸 골딘의 사진집은 040씨가 작년 생일선물로 사주었다. 해외 직구 뿐이라 귀찮고 비쌌을 텐데.. 책장 가장 높은 곳에 전시해두고 항상 고마워 하는 중이다. 





by.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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