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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주 Apr 13. 2023

한잔하자

만남의 언어

 친구들과 만남을 약속하던 말들은 시절이 지나며 바뀌어왔다.


 한창 뛰놀던 초등학교 때는 "축구공 있는 사람?"이었고, 엄마 몰래 게임을 즐겼던 중학교 때는 "끝나고 PC방?"이었으며, 공부라는 핑계가 가장 좋았던 고등학교 때는 "일단 독서실 들를 거지?"였다. 그리고 성인이 되면서 이 말들은 "한잔하자."로 바뀌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그런 건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 학과 행사가 있어도, 전시회를 가도, 운동을 해도 항상 그 끝에는 술자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거절할 수 있는 상황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과 잔을 부딪히며 그날 있었던 일들의 감상을 풀어놓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술은 거의 모든 만남에 존재했다. 대화와 미식의 필수 요소로 주 소재가 되기도 했고, 감상과 여유의 조연이 되기도 했으며, 쿠키 영상처럼 본 만남의 끝을 강렬하게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세상 모든 재밌는 일은 술자리에서 벌어졌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도 항상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한잔하자."


 이별이나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위로받고 싶을 때,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취업처럼 축하받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건네는 연락은 항상 "한잔하자."였다. 이런 연락이 계속되다 보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물음을 던진다.


 "무슨 일 있어?"


 전화나 메세지로 다 할 수 있는 얘기라면 굳이 만날 필요도 없고, 맨정신에 가볍게 끝낼 얘기라면 술을 마실 필요도 없다. 반면 술자리에서 만나게 되면 속 깊은 얘기를 하며 진하게 감정을 나누는 상황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한잔하자는 말에 이유를 묻곤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별 이유 없이 만나는 상황도 많긴 하지만.


 오랜만에 보고 싶은 친구에게 "잘 지내? 간만에 한잔해야지?"라는 안부 인사를 건네고, 정말 가고 싶은 맛집이 생겼을 때 "요즘 날씨가 한잔해야 할 것 같은데?"라며 능청스러운 약속을 잡기도 한다. 그렇게 '한잔'이라는 단어는 인사와 약속의 시작을 매끄럽게 만들어줬다.


 어린 시절 친구만 만나면 습관처럼 찾던 운동장과 PC방은 이제 술자리로 바뀌었다. 그에 맞게 만남의 언어도 바뀐 것이다.

 단어 그대로 한잔만 하지 않을 걸 알지만 누군가 보고 싶을 때면 또 "한잔하자"며 친구들에게 메세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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