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 그리고 느긋하게 찾아온 밤바다
어린 시절 바다를 갈 때면 늘 아침 일찍 출발했었다. 교통체증을 피할 수 있고, 휴일이라면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이유들로.
쉬고, 먹고, 즐기기 위해 알람 소리에 시달리는 건 나에게는 큰 모순이었다. 전 날 밤부터 다음날 일어날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것도 편치 않았다.
어른들 없이도 여행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토요일 아침이 아닌 금요일 저녁 느지막이 바다로 떠났다. 차도 막히지 않았고 새벽 기상에 거슬릴 일도 없었다.
살짝 늦은 밤,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코로 큰 호흡을 들이키며 바다 내음을 맡는다. 비로소 바다에 왔음을 실감하며 사람들의 목소리와 바다를 비추는 조명이 가득한 거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비릿한 내음이 짙어지면 이내 조개구이집들이 보인다. 해가 진 바다의 선선한 공기는 뜨끈한 연탄불을 맞이할 준비까지 마쳤다.
바다를 보고 느끼며 바다를 닮은 냄새와 맛을 본다는 것. 조개구이로 바다에서의 저녁을 채우는 이유다. 맥주로 입가심을 한 뒤 조개 한 입에 소주 첫 잔을 넘긴다. 그제야 밤에 들어선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연거푸 잔을 꺾어대며 가끔씩 고개를 돌려 밤바다를 바라본다. 분위기에 취했지만 아직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 하지만 금세 병이 늘어가며 취기는 밤바다의 분위기와 함께 나를 적신다.
곧 마지막 잔을 비우고 바라만 보던 해변으로 향한다.
취한 나를 기다렸다는 듯 달빛에 비치던 윤슬이 발밑까지 와 잘게 부서진다. 마중 나온 잔파도에 화답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발을 담가본다.
밤바다는 푸른빛을 감췄지만 어둑한 표면 위로 온갖 빛을 비춘다. 밤에 치는 파도 소리는 낮과는 다르게 사람들의 목소리를 감싼다. 그 모습과 소리에 빠져들며 밤바다의 품을 느껴본다.
홀로 감상에 젖다가도 친구들과 짠내나는 바닷물을 끼얹어도 본다. 얕은 해변을 한동안 첨벙대다 어느새 파도의 끝을 놓쳐버린다. 그 와중에도 술기운은 붙잡고 있기에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구속되지 않은 순간을 만끽할 뿐이다.
그렇게 바닷물과 모래사장을 오가며 안락한 밤바다를 위태로운 낭만으로 채워간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르다 무릎 근처까지 물이 찰랑이는 걸 느낄 때쯤 취기는 파도와 함께 쓸려나간다.
“그만 나가자. 사고 나겠다.”
"그래. 술이나 한 잔 더하자. 다 깼다."
살짝 올라온 취기는 바다를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줬고, 친구들과의 추억을 더 깊게 만들어줬다. 그 낭만이 더 위태로워지기 전, 쓸려나간 취기를 다시 찾으러 떠난다.
느긋하게 찾아온 밤바다를 잠시 뒤로하지만, 그곳에서 나눈 교감은 간직한 채 잔을 기울인다. 그렇게 술과 바다는 아무런 조건없이 낭만을 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