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고을선집 18호 종합문예지「청목」참여작
제가 너무 늦었나요? 인사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인기척도 없이 헤어진 지 벌써 만 38년째이니 생사를 확인하기조차도 어려운 상황에서 급한 안부를 먼저 꺼내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 할 수 없지요. 믿어지세요? 믿기지 않지요? 저도 그래요.
자의 반 타의 반 주소도 전화번호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들, 1995년 IMF보다 먼저 시작된 남편의 사업 부도를 20여 년간 너 댓 번이나 맞고서야 늘 재확인하듯 하는 것이 전자회사와 직통하는 우리 학과 안부들이었죠. 형뿐만이 아니라 우리 전자과 반장 언니를 비롯하여 여학생 동기들과 초중고 모든 친구들과도 담을 쌓듯 살아온 건 제 탓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리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제가 이렇게 소식의 힘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이 연애라고 여기신다면 아마 저는 이미 38년 전에 형을 버렸을 오해라는 걸 모르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아직도 사실 직업훈련원이라는 기관이 그다지 입에 담고 싶은 맘은 없는 이유로 그냥 학교라고 말하지요. 직업훈련 기관에서 강의를 하거나 직접 운영도 가능한 현실정임에도 불구하고요. 물론 1986년 광주직업훈련원에 우리들이 입학하였을 당시 이미 전문과정이 시작이 되었었고, 분명 전문대 수준의 대학본부와 학교의 위엄을 보고 즉시 입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저였지만 정규교육 외적인 평생교육이 실현되는 장(場)에 대한 올바른 인식 재고(再考)의 필요성을 늘 염두(念頭) 하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들 양심의 갈등들이 아닐 수 없음을 기억해요. 정말 반가워요. 진정 형들에게 안부를 전할 이유들로 수필가로 당선을 했다고 하여도 틀리지는 않아요.
형을 비롯한 네 명의 형들과 KH와 낯선 평택에 갑자기 조기 취업이 된 1986년 10월부터도 우리들의 여정은 학과의 이슈(issue)가 당연했겠고, 조기 취업처럼 조기 퇴사한 제게, 그 무렵 ‘형’이라는 대중가요도 라디오에서 반갑게 들렸었지만, 저는 편지를 형들에게 쓴 건 아니었고 다른 동기 아이들이 썼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일들이지요. 저도 펜팔(Pen Pal) 경험이 1984년 초겨울 서울에서 있었어요. 산학협력업체의 명성여고 1학년을 자퇴 후 망연자실하듯 우연히‘TV가이드’라는 잡지를 통해 기숙사 같은 방 언니들과 함께 참여한 에피소드들로, 우울한 맘 달래기에는 신나는 일이 맞지요. 다만 예법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요. 그렇다 하여 오랫동안 주고받은 것도 아닌 단 한 번으로 종료되었고, 하지만 나름 추억의 향기를 지닌 소중한 날들에 있는 일들이니 우리 반 여학생들의 편지가 형들에게 있었다면 즐거운 날들의 회상이 당연하겠지요.
저는 여전히 1986년 그때나 다름이 없는 것이 맞고요, 다만 2주마다 쇼트커트를 하던 저는 그 이듬해 봄 종결이 되어 허리까지 닿던 긴 생머리는 저의 새로운 트레이드마크(trademark)가 되기도 하였고, 퍼머도 하고 립스틱도 바르게 되었지요. 결혼식을 1993년에 올린 남편과 세 딸이 있다는 가정주부가 제 중심이 된 것이 당연하고요, 사실 아름다운 추억들임에도 서로의 삶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다 잊고 싶었던 것이 진심이며, 그렇게 살아왔었고 그리하다 부도라는 어마어마한 위기를 당하고서야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이어보는 일들이 되풀이되는 현실들이지요. 제 결혼식을 앞두고 학과장님과 다른 선생님들께 MS와 열차를 타고 직접 찾아가 뵙고 결혼 소식을 전해드림으로 그나마 선생님들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매우 급한 일들 중 첫 번째로 꼽는다면 KH는 12년여 전 간암과 폐암으로 하늘로 갔고요, 저도 지인들을 통하여 듣게 되었던 부음(訃音)이었기에 아직까지도 길가의 행인들이 KH로 보이는 착시가 나타나기도 하고 형들이 알고 있듯 우리들 여섯 한 집에 같이 자취할 때, 친자매처럼 밤새도록 서로의 말벗이 되기도 하던 그 애가 반가운 반면 괴로운 지경이며, 다만 ‘나를 하지 말라’는 제 경고를 무시한 값으로 간 길이니, 이즘에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의 ‘나는 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의 길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마이웨이(My Way)를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형의 입장만으로도 ‘왜 네가 KH니!’가 당연한 온당한 길인 것이지요. 다만 1988년 서울에 방을 얻고 자취를 시작하며, 형들과 함께하던 당시 KH에게 ‘함께 유학(遊學) 하자’는 제 편지 권유에 동참을 하여 서울로 상경 후 KH의 학업의 길이 다시 열렸었고, 그 첫 발자국들에서 KH는 광신도적 신앙생활로 저를 놀라게 하며 새벽이면 가까운 작은 교회에 다녀와서는 제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었지요. 그 일이 두어 차례로 끝나게 되었던 것은 잠결에 KH의 손을 제 이마에서 느끼고 놀라 눈을 뜨며 버럭 화를 냈었고, KH도 놀라며 마지막이 되었었지요. 1986년 입학 직후 방황하는 KH에게 팔베개를 해준 제가 있었고, 그런 저를 ‘언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처음 사랑한 사람이야. 꼭 우리 엄마 같아.’라는 말과 편지로 답하여 저를 놀라게 하고 어리광을 부리더니 다시 그 기도를 감사히 여긴 저로 말미암은 이 길이 그 길이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남편들끼리 바뀌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제 경고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결과로서의 길이었으니 그리워도 화를 냄이 당연하지요. 또한 KH의 세상과의 이별 소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간에서는 KH의 결혼 전 그대로의 생활이 현재 일상에 연장되듯하여 남편과 남매를 두었던 KH부활설에 가까운 현실들일 수 있으며, 생존하는 제가 죽은 자 처리되는 현상들로 피해가 유발되기도 하는 것이니 이를 알리지 아니 할 수 없어 우선 말씀드려요. 사실, KH도 형들처럼 저에 관해 많은 것을 아는 듯했지만 제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제가 특별히 한 적이 없지 싶고요, 그런 이유로 저를 다른 사람이라고 오해가 되어 중요한 일들이 자꾸 어그러지고 저를 배제하게 됨으로 보여 지면으로나마 전해드립니다. 저와 KH만 잘 풀어도 제 주변 동성애나 오류들 관련 문제는 한 짐이 풀리는 것이 당연하겠고요, 이런 이야기를 왈가왈부한다는 자체가 의심받을 대상이기도 할 수 있지만 두고 보기만 한다 하여 이뤄지는 것들이 아니며 피해만 산더미처럼 가중되어 공든 탑들이 언제 쌓았더냐 하며 무너지는즉, 벌레는 빨리 살충제를 사용하여 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1874년 3월 26일 ~ 1963년 1월 29일, 미국 시인)의 시(詩)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연처럼 두 개의 길을 관망하며 가지 않았던 길, 그러나 선택한 길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반추(反芻) 할 것이라는 예상처럼 <사람들이 덜 다닌 길>위에서 늘 방황하고 괴로워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을 개척자처럼 말하게 된 현실입니다. 즉, 대인류는 고속도로를 선택하여 다니지만 남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색다른 길에서의 갈등들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제게 전자과도 사실 그러한 길이었고, 자퇴한 고교를 1985년 다른 학교로 재입학을 위해 귀향하여 쉬던 중 고향 아버지의 권유로 ‘읍사무소의 워크숍’에 동원되어 1주일가량 읍사무소 직원들과 친구의 언니와 봉사활동을 여관에서 진행하며 추천받아 갔던 우연한 길이 저의 전자과였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신나고 공부만 전념할 수 있기를 희망한 만큼 형들도 아시다시피 국가자격증 3개를 취득한 해였으니 제겐 너무 감사한 한 해였지요.
오늘 이 글은 시차를 반영하듯 동분서주로 이일 저일 섞어가며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아시지요? 형들과 다른, 저나 KH나 MS는 여성이라는 것을요. 입학 직후 학교와 담임선생님의 방침에 의하여 전자과 B반 여학생들 전원은 남학생들에게 오빠가 아닌‘형’이라고 부르도록 지침 된 여대생의 생활과 같았던 「1986년 광주직업훈련원」, 현재는 「한국폴리텍5대학」이 되어 대학 홈페이지 몇 페이지에서 형들과 여학생 동기들의 모습도 확인이 되고 있어 진실로 감동하며 저장해 두었지만 또한 놀랐던 것은 저나 KH나 MS는 없는 사진들로 더구나 닮은 사람을 저라고 지목 당하기도 하여 봉변 중이었나 싶어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기도 하였습니다. 하기는, 형들도 전원 동참된 사진은 아닌 것으로 아마 토요일 주말에 집에 다니러 간 날 CBS 라디오 방송국에서 내방하여 제작한 프로그램으로 참여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으나 저는 집에 다녀오는 것이 더 필요하여 불참한 효과, 그 효과로 지금까지 불행인 것인지 진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형들의 기억이 KH와 MS를 제게 붙였기도 하다는 거죠? 이유 불문하고 1986년에는 친자매들처럼 화친한 우리들이었으니요. 저도 그리운 시절이 당연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여전히 변함이 없는 저로 하여 KH도 MS도 지상에서 사라지는 중인가 하여 너무 슬픕니다. 그 길에서 우연처럼 형들도 그 아이들과 동행으로 죽음만을 바라고 살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벌써 일흔 고희(古稀)를 앞두고 계시다는 걸 누가 알까요. 믿기지 않지요, 고희를 앞두신 분께 제가 「형」이라고 하다니요! 그것도 여인(女人)인 제가요! 40년 이상 무소식들이던 초중고 제 친구들이 제게 놀라고 미쳤다고 판단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그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이 길들이지 싶어 급히 전해드립니다. 실제로 커밍아웃하고 트랜스젠더가 된 자들은 제가 당연히 아니에요! 거론할 가치가 필요 없는! 아시지요?
저는 순수문예지「문학고을」에 있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제 블로그에서 언제든지 볼 수 있어요! 형! 죽지 마요! 동명이인 ‘정안나 수필가’와 ‘정안나 시인’은 다른 사람이에요! 1986년 광주직업훈련원 전자과 정안나는 2024년 11월 문학고을 수필가로 당선된 사람으로 지금 이 글 쓰는 바로 저예요! 전자과 담임선생님과는 당선 이후 어렵게 전화 통화로 안부를 드렸습니다. 감사히 받아 주시고 격려해 주시어 진심으로 감사했지요. 죽음에 지면 안돼요! 죽음은 죄의 삯일뿐이에요! 고희가 코앞이시겠지만 제게는 여전히 20대 청년 형일뿐이에요! 저 역시 그렇고요! 물론 다 같이 동창회처럼 다시 뵈면 갱신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요. ...... 애들 아빠가 가져온 커피믹스 스틱이 4개 남았어요. 아니, 2개 남은 거예요, 집에 2개 남아 있었거든요. ......
P.S :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느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로마서 6장 23절)」, 저는 24년 차 ‘정안나 집사(執事)’이기도 해요, 형,
©정안나
발행일|2025년 7월 11일
감사합니다
©정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