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서고에 꽂혀있던 책이 인생 전반을 좌우한다

수상할 정도로 러시아 소설이 많았던 우리 집

by Jannsu


맞벌이 부모님, 6살까지 형제 없이 홀로 자란 나는 심심할 때마다 엄마가 사다 놓은 책들을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이상하게 우리 집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많았다. 어릴 때 뭘 안다고 <가난한 사람들> <죄와 벌> <톨스토이 우화집> 같은 걸 4-5번씩 읽었다.


근데 어릴 적 나는 그런 책을 읽는 나 자신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겁도 없이 대학 전공도 러시아어과로 선택했다.
러시아 문학 어차피 읽을 거, 러시아어 익혀서 원어로 읽자! 그게 진짜 멋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기대했던 건 문학을 읽을 수 있는 러시아어 소양과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해석이었는데,

러시아 문학 과제가 이런 식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와 레빈이 몇 번 마주치는지 직접 찾아 수.기.로 쓰시오."


안나 카레니나가 유명한 벽돌책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보통 3권에 걸쳐서 나와있는데,
진짜로, 책 3권을 펼쳐 들고 두 인물이 만나는 장면을 수기로 셌다.


도대체 왜 이걸 일일이 세게 하는지 교수님한테 끝내 설명을 못 들었다.(아마 끝까지 어떻게든 읽게 하려는 의도였을 거다)


아무튼 그날 밤, 안나보다 내가 더 고통받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안나와 레빈은 총 27번을 만난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 인간 삶의 고통과 모순, 체제의 불합리함을 일찍 깨우쳐

안 그래도 복잡한 인생이 더 복잡해진다.


정말 결론이 모두 '죽겠다'이다.

그럼에도 어떡해, 죽겠어도 태어난 이상 살아야지가 기본 삶의 모토가 되어버린다.

남들도 다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사회에 나가보니 아니더라.


다들 의외로 가볍고, 요령 좋고, 상처도 빠르게 털어내고, 생각보다 나만 복잡하더라.

내 삶이 괜히 무거워진 이유?
돌이켜보면, 나 혼자 너무 무거운 책만 읽어서 그랬다.
10대 시절의 나는 방학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들고 고뇌했고,
인생의 의미를 찾느라 감정의 낙차를 일부러 키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그런 내가 싫지 않다.
오히려 그런 궤적을 따라 살아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지 못한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타인의 복잡함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다들 단순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들 있더라.
그걸 눈치채고, 존중하고, 보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가진 이 복잡함을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잘 써먹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 출발선은 늘 엄마가 꾸려놓은 책장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엄마는 학생 운동권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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