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오랜만에 연락이 닿는 지인들이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가 그렇게까지 힘든 줄 몰랐네.”
연일 일부 학부모님의 과도한 요구와 거친 말로 고통받는 교사에 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께서는 몇 년이 지난 일을 세상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그간 얼마나 삼키고 또 삼키셨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립니다.
10년 넘게 교직생활을 하면서 많은 학생을 만났습니다. 또 그만큼의 학부모님을 접했습니다. 망각이 특기인 사람인지라 그동안 만나온 학부모님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저에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분들을 잊지 못합니다. 특별한 경험은 빨리 지워버리고 싶은 것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것으로 나뉩니다. 글로 남기는 것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경험입니다.
아주 가끔 담임에게 손 편지를 써주시는 학부모님이 계십니다. 저는 두 분을 만났습니다.
첫 담임을 시작할 때 어느 학부모님께서 손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였습니다. 선생님의 첫 담임으로 만난 학급 학생들과 재미난 추억을 많이 쌓길 바란다는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후 학생이 졸업할 때 또 손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학생이 2학년 때 담임한 것이라 저에게까지 손 편지를 써주심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간 너무 감사했다고.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을 적어주셨습니다.
2년 전 새로 전근 온 학교에서 첫 담임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학교로 저희 반 남학생과 저에게 온 편지가 있었습니다. 발신인이 동일했습니다. 학생의 어머니. 학생에게 편지를 가져다주니 쑥스러운지 얼른 가방에 넣었습니다. 편지를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던 것을 보면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어머니께 편지를 받았나 봅니다. 아마 하교하는 길에 편지 봉투를 뜯어 어머니의 마음을 읽었겠지요. 저도 퇴근하는 길에 아들이 만난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다음 해 저는 육아휴직을 했고 그 남학생은 3학년을 보내고 졸업했습니다. 올해 스승의 날 그 어머니께 문자가 왔습니다. 용건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졸업한 뒤에 연락 주시는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 개학날 학급 학생들과 처음 만나는 선생님(이병헌)이 학생들에게 전하는 명대사가 있습니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히는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에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현고등학교. 그중에서도 2학년. 그거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또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두 분의 학부모님께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만난 인연과 사랑하는 가족이 만난 인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부디 이 글이 정서적 촌지를 강요하는 글로 비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우리 선생님들이, 우리 학생들이, 우리 학부모님들이 말도 안 되는 엄청난 확률로 만난 인연의 씨앗을 함께 아름답게 꽃피우는 관계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배경 출처: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