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배기 딸과 함께 읽은 책에서 보았다.
나무늘보도 물속에선 빠르다.
제자 (가명) 혁이와는 인연의 끈이 길고 질기다. 교직 첫 해 만났고, 지금도 가장 편하게 연락하곤 한다. 혁이는 늦둥이다. 큰 누나와 11살 차이다. 나와는 12살 띠동갑. 아마 나를 꼰대 형 정도로 생각할 게다.
처음 만났을 때, 혁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뽀얀 피부에 덧니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귀여운. 당시 근무하던 학교는 광주광역시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 그 와중에도 뒤처지는 학생은 존재하기 마련. 한창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을 나이에 공부로 부각되기 어려운 학생들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혁이도 그런 학생 중 하나였다. 가끔 친구와 주먹다짐도 하고 수학여행에서 찐한 추억을 만들고자 일탈 행위도 좀 하는. 공부는 아주 젬병이었다.
학교에서는 수학, 영어 학업 성취도가 기준 미달인 학생을 대상으로 ‘스텝업’이라는 방과 후 수업을 운영했다. 혁이도 물론 그 수업에 참여했다. 오후 4시 30분부터 5시 15분까지 진행되는 그 수업의 첫 시간을 잊지 못한다. 학교 일과를 마치고 PC 방으로 등교해야 하는데 억지로 앉혀놓고 수학을 배우게 하니 좀이 좀 쑤셨을까? 패잔병들 마냥 기가 죽어 허리는 굽어 있고 두 손으로 턱을 괴어 간신히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 버티면서 몸을 배배 꼬던 14명의 남학생들. 일과 중에는 그렇게들 나대더니. 대다수 혁이와 비슷한 부류였다.
학생들의 초점 잃은 눈빛을 보고 45분 동안 수업 해봐야 피차 시간 낭비라 판단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경험은 부족하고 의욕만 넘치는 초임교사가 생각해 낸 특단의 조치란 우리 선조들이 아주 오래오래 사용했지만, 그 방식이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미개하다고 판단되기에 지금은 법적으로 금지된 회.. 초... ㄹㄹ 리였다. 미안하다 그때 너희들.
개념 및 문제풀이를 설명하고 가장 기초적인 8문제로 구성된 쪽지 시험을 보았다. 한 개 틀리는데 회초리 하나. 최선을 다해 휘둘렀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 그때 너희들. 깜빡하고 이름을 쓰지 않으면 0점 처리했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학생들은 초 집중했다. 흐리멍덩했던 눈빛은 틀리지 않으려는 일념으로 반짝거렸다. 첫 시험에서는 대다수가 6대 이상은 맞았을 거다. 바로 10분 뒤 숫자만 바꿔서 두 번째 시험을 보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질문하고 알려주는 하브루타 학습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 시험에선 회초리 수가 줄어들었다. 세 번째 시험, 네 번째 시험. 저녁을 먹이고 수업을 계속했다. 4시 30분에 시작한 수업은 밤 9시가 돼서야 끝났다. 그렇게 스텝업 수업은 매일 밤 9시가 넘어야 끝나는 수업으로 바뀌었다.
보통 첫 시험에서 시작되는 6대 정도의 매 타작은 어두운 밤이 되면 2대, 1대로 줄어들었으며 마침내 한 개도 틀리지 않게 된 학생들은 포효했다. 손흥민의 세리머니가 초라할 정도. 집에 가서 종아리에 약 발라주시는 어머니께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고들 한다.
엄마,
수학 시험에서 100점 맞았어!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학생들의 성취도는 빠르게 향상되었다. 기초적인 8문제로 시작했지만 꽤나 수준 높은 문제를 추가할 만큼.
대망의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그즈음 스텝업 수업은 저녁 10시가 넘어야 끝났다. 지나치게 무리한 나는 수업하다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학생들은 시험을 기다렸고 기대했다. 나 역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0~40점을 벗어나보지 못했던 학생들이 70점을 넘는 기염을 토했다.
학생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이후에도 9시까지 진행되는 스텝업 수업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PC 방에서 저녁을 헤매는 친구를 데려오기도 했다. 어느 순간, 더 이상 회초리는 필요 없을 것 같아 회초리를 넣어두었는데 학생들이 요청했다. 다시 꺼내달라고.
혁이는 그 학생들 중에서도 뒤처졌다. 분명 성장하기는 했으나 가장 많이 회초리 맞는 학생이었으며 중간, 기말 성적에서의 성과도 미미했다.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걸 좋아했고 수업 분위기를 밝게 돋우는 명랑함을 잃지 않았다. 가을 어느 날 저녁, 혁이가 제안했다. 겨울 방학 때, 스텝업 멤버들 다 같이 제주도 가자고. 나는 멤버들의 기말고사 평균이 몇 점 이상 되면 가겠다고 흔쾌히 호언했다. 사실 못 넘을 줄 알았다.
어쩌지 넘어 버렸다. 15명이 넘는 남자 중학생을 데리고 제주도에 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약속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학생들에게도 평생 남을 추억이 될 거라 생각해 추진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학교 모든 선생님들의 깊은 우려를 뒤로하고 완도항에서 제주도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해에도 스텝업 수업은 계속되었다. 몇은 일탈하여 다시 PC방을 헤맸다. 심하게 일탈하는 학생은 정학 맞기도 했다. 혁이는 일탈하지 않고 끝까지 스텝업 수업에 남았지만 성적은 쉬이 오르지 않았다. 졸업할 때쯤 혁이가 결론 내렸다.
공부는 안 되겠다.
혁이는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백종원을 꿈꿨다. 혁이가 2학년 되던 해에 나도 그 고등학교로 옮겼다. 혁이에게 수학 시간에는 사업가가 쓴 책을 읽던지 요리 공부를 하라 했다. 금요일 저녁이면 내가 자취하는 방에 모여 몇몇 학생들과 함께 혁이의 요리를 맛보기도 했다.
졸업 후 바로 대형 뷔페에서 일을 배웠다. 1년 후, 해병대에 입대했고 건장한 청년이 되어 전역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1년 정도 여행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형 카페 매니저로 일했다. 일하는 와중에 틈틈이 사업을 구상했다.
미국에서 본 후카바를 사업 아이템으로 정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이태원과 홍대에 후카바가 좀 있었고 지방에는 전무했다. 지방 소도시에 자리를 정하고 간단하게 혼자 인테리어를 했다. 1인 창업이었다. 장보기, 요리, 서빙, 계산 등을 혼자 다했다. 후카바는 물 담배 피우면서 술 마시는 공간이기에 양아치의 집합소가 될까 걱정했던 혁이는 안주 가격을 그 도시에서 가장 비싸게 책정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대성공이었다. 오픈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아 투자금을 회수하고도 남았고 매달 1000만 원을 훌쩍 넘는 수익을 올리고 있다. 양아치들은 호기심에 한두 번 오기도 했지만 비싼 안주 값에 이내 발걸음이 뜸해졌고 지역 유지들의 자녀, 돈 많은 젊은 사업가들이 손님으로 채워졌다.
물론, 이는 시작일 따름이다. 그는 이제 겨우 한국 나이 26살 청년. 사업이 흥하기도, 기울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계속 배워나갈 거고 궁극적으로 그가 꿈꾸는 위대한 기업가가 되리라 확신한다.
스텝업 수업에서 공부하던 학생 중에는 벌써 초등학교 교사가 된 제자도 있고, 목사님이 된 제자도 있다. 아, 이전에 브런치에 올렸던 ‘고려대 의대 수석 입학한 제자’도 그 수업 출신이다. 물론 성취도 기준 미달은 아니었다. 조교 역할을 하며 친구들에게 크게 도움 줬다. 이 제자도 쪽지 시험에서 틀리면 회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질풍노도를 정면으로 부닥치며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엎어지기도 했던 배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항해 중이다. 제자들의 성공, 행복한 삶을 응원한다.
나무늘보도 물 만나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