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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장훈 Oct 20. 2023

엄마 손잡고 서울대 간 여학생

두 돌배기 딸을 육아 중입니다. 자랑입니다만 주위에서 제 딸을 보곤 유니콘 베이비라고 합니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육아를 하고 있다고.


저는 지랄 총량의 법칙을 믿는 편입니다. 아기 엄마가 임신했을 때, 입덧이 아주 심했습니다.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만지면 아빠와 하이파이브라도 하려는지 온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산만한 태아였습니다. 출산 예정일이 2주가 지났는데도 전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더군요. 아내가 유도 분만 주사를 맞고 22시간을 진통 속에서 괴로워한 후 나온 아이입니다. 우리 부부는 신께서 딸에게 할당한 지랄을 태아 시절 어지간히 발산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발.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린 시절 고이고이 감쳐둔 지랄을 사춘기 때 짠하고 거침없이 드러낼 수도 있겠지요.


중,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우리 딸이 중, 고등학생이 되면 어떤 모습일지 종종 상상합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지금까지 가르친 학생 중에 우리 딸이 꼭 저렇게 컸으면 하는 학생 있어?” 가장 먼저 민아(가명)가 떠오릅니다.


고등학생이었던 민아의 체구는 작디작았습니다. 허나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에너지는 크디컸습니다. 예의 바른, 친절한, 정직한, 정의로운, 성실한, 너그러운, 여유로운, 배려할 줄 아는, 미소가 예쁜, 인사를 잘하는,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정중히 거절할 줄 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근데 공부마저 잘하는 등등. 선생님들이, 친구들이 민아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참 밝았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지 말지를 대다수 학생이 좋고, 싫음에 따라 결정합니다. 선생님이 좋으면 수업을 잘 듣고 싫으면 이유 없이 대듭니다. 수학 문제 질문하는 친구가 좋으면 도와주고 싫으면 귀찮아합니다. 중학생들에게서 이런 모습이 많이 보이죠.


이익 여부에 따라 판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선생님이 싫어도 괜히 싫은 내색 해서 안 좋은 평가를 받을까 봐 앞에서는 좋은 내색만 합니다. 내신 등급이 산출되는 과목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지 않은 과목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고학년일수록, 공부를 잘하는 학생일수록 이런 모습을 보이곤 하죠. 이해는 됩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정말 바쁩니다. 이익되는 것만 해도 벅찰 만큼.


아주 드물지만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따라 판단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어느 과목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합니다. 수업 준비하신 선생님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수업에 집중합니다. 질문하는 친구가 누구든 도움 주고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합니다. 민아가 바로 이런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다 큰 성인 중에서도 이런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렵습니다. 저부터가 좋으면, 이익이 되면 움직이는 작은 그릇일 뿐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키우면 민아처럼 될까요? 차를 타고 출근하던 어느 날, 민아가 엄마 손을 잡고 힘차게 걸으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힌트를 얻었습니다. 민아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걸립니다. 스치듯 보았지만 손잡고 걷는 엄마와 딸은 참 행복했습니다. 대한민국 고3, 고3 학부모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민아 엄마는 일하시는 분입니다. 아침이 결코 한가하지 않으셨을 텐데.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모녀는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요? 조별과제에서 무임승차하려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민인 딸에게 엄마는 지혜로운 대처법을 알려주었을 겁니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으로 스트레스받는 딸에게 엄마는 ‘괜찮다고,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토닥였겠죠? 엄마와 손잡고 걷는 등굣길 위에서 딸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위로를 받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을 겁니다. 민아의 고귀한 인격은 등굣길 위에서 쌓아졌나 봅니다.   


담임했던 학생이 SNS에 올린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 중 엄마 얼굴 제대로 보는 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데 그 시간 내내 잔소리만 들었다고. 물론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비싼 돈 들여 늦은 시간까지 학원 보내고, 제대로 소화해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마음도 자식을 향한 귀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사랑과 격려의 표현이 너무 적습니다. 학생들이 부모님께 삶의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무척이나 짧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사랑하는 아들, 딸의 손을 잡고 같이 등교해 보는 건 어떨까요? 차 태워주신다면 신호 기다리는 동안 손을 꼬옥 잡아주실 수도 있겠죠?


두 손 맞잡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사랑, 용기, 삶의 지혜를
나눠주세요.



민아는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영악함을 쏙 뺀 영리함이 대한민국 입시에서 통하기도 하네요. 아마 면접 보신 분들이 민아의 밝은 에너지에 반했을 겁니다.


저도 딸의 손을 잡고 부단히 걸어 다니렵니다. 서울대는 못 가도 괜찮습니다. 고귀한 인격은 꼭 갖췄으면 좋겠네요.


믿는 대로 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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