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 컴퓨터가 주는 자유

고맙네^^

by 화원

"선생님~ 저기 물통이~." 애들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내 텀블러가 조용히도 쓰러졌다.

그리고 전선들이 다 지나가는 그 위로 한 컵 정도 되는 물이 쏟아졌다.

'아 여기 다 전선들인데...'

전선더미를 감춰둔 전선 몰딩까지 열고 들춰가며 열심히 휴지로 닦았다.

'컴퓨터 기사님이 오실 때마다 먼지투성이라 죄송했던 내 책상 아래를 이제야 꼼꼼히 청소하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내 책상 바닥 좀 청소하자.'

바닥 닦느라 휴지를 10장은 썼을까, 그제야 책장 문짝을 열어보니 뚝뚝 남은 물들이 더 떨어진다.


우선은 닦고 나서 앞뒤 사정을 생각해 봤다. 아, 내 소중한 과자상자~ 문이 앞으로 열리면서 텀블러를 친 것이었다. 나무로 된 2단 과자상자, 아래엔 차류를 넣고, 위엔 사탕이나 비상 과자들을 넣어두어 보기만 해도 흐뭇하곤 했던 건데. 아래칸에 조금 큰 차트레이를 넣었더니 그게 좁아서 앞으로 열리는 작은 문이 가끔 열렸었다. 그래서 가끔 거슬리긴 했는데, 그걸 고칠 여유도 없이 살았더니 결국 사고를 쳤다. 무엇이든 손이 가지 않는 건 이렇게 티가 난다.


교실벽 쪽에 붙여 놓은 낮은 책장 위에 있던 과자상자, 그리고 그 앞과 옆에 나란히 있던 커피포트, 물통, 텀블러..

이 일로 대대적인 구조변화를 했다. 과자상자를 오랜만에 열어보니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가 있어서 버렸다. 여름을 지나면서 물러버린 사탕도 버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자신이 병가 냈을 때 보결 들어와 줘서 고맙다며 준 꽤나 맛있어 보이는 '오레오 쿠키 초콜릿'도 그동안 아끼느라 안 먹었는데 오늘 보니 유통기한이 일주일 지나있었다.

'에이, 정말 뭐든 아끼면..'

바로 버리긴 아까운 마음에 그래도 초콜릿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뭐 맛은 있었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걸 먹는 게 불편해서 절반을 남기고 잠시 쉬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걸 보고 물어본다.

"선생님 저 책상 위에 초콜릿이~. 저도 주시면 안 돼요?"

"아 그게, 유통기한이 좀 지난 거라. 주면 안 될 것 같아."

"먹어도 되는데요. 우리 엄마가 유통기한 조금 지난 건 먹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어른들은 뭐 먹어도 별 탈 없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배 아플 수 있어. 엄마에게도 유통기한 지난 건 주지 마시라고 해."


아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느껴지는 이 낯선 분위기.. 모니터가 왜 까맣지? 그러고 보니 어느새 컴퓨터가 꺼져버렸다. 다시 켜보려고 눌러봐도 아무 반응이 없다.

'주변 프린터, 인터폰 다 되는데 왜 컴퓨터만?'

'새로 바꾼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컴퓨터인데 왜?'

'혹시 컴퓨터에 물이라도 튀었나?'

'아니야 그래도 물 떨어진 곳과 80cm 정도는 떨어졌고, 물이 그리로 바로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일단 불안하니 모든 멀티탭 전원을 다 차단하고 예정대로 병원 가느라 조퇴를 했다.

'제발 하루지나 내일은 모든 물기가 다 마르고 컴퓨터가 켜지길~'


다음날 아침 출근해서 혹시나 하고 다시 컴퓨터를 켜봤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래서 학교 컴퓨터 AS 담당 기사님께 문자를 드렸다. 이러이러해서 컴퓨터가 안 켜져요.. 내가 학교 기자재담당자라 그래도 기사님 번호를 바로 갖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에 의한 쇼트는 티가 날 거예요. 아마 수리비 많이 나올 듯합니다."라는 절망스러운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컴퓨터 제조사에서 직원이 방문할 거라고 하셨다.

'아.. 큰일이 되었어..'


1~2교시는 과학시간, 과학실에 가서 수업을 하니 다행이었다. 거기서 컴퓨터를 켜서 동학년에게도 이 비상사태를 알렸다. "저에게 연락은 카카오톡이나 인터폰으로 해주세요." 비상사태지만, 비상사태에 당황하면 안 된다. 선생님의 당황은 아이들에게 걱정과 불안만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체의 무게와 부피에 대한 실험에 집중했다. 손펌프로 종이컵을 움직이며 놀고, 공기주입장치로 공기를 넣고, 감압장치로 공기를 빼며 기체의 무게를 재는 것. 아이들은 과학실에 와서 실험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일단 두 시간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3교시는 교실로 와서 과학, 아까 실험했던 걸 실험관찰에 기록하면서 정리했다. 4교시 음악, 아이들이 물어본다.

"선생님, 컴퓨터 고장 났는데 음악 시간 어떻게 해요?"

"노래 부르면 되지~"

내가 '퍼프와 재키' 노래를 2마디씩 불러주면 아이들이 따라 부른다. 그리고 리듬막대 2개를 박자마다 치면서 아이들의 노래와 리코더 연주의 박자를 지켜준다.


맞아, 옛날엔 그랬다. 내가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두 발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누르고, 몇 건반이었을까? 그 좁은 건반을 왔다 갔다 하며 연습했던 대로 반주하던 내가 살짝 기억이 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서는 교실 풍금이 모두 사라졌다. 소위 '정보화' 시대로 넘어가서 이젠 풍금으로 연주하는 대신, CD에 녹음된 음악 반주나 노래를 들려주면서부터였다. 요즘은 그 CD 조차도 사용하지 않는다. 인터넷을 켜면 온라인 자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요일이라 4교시, 큰 사고 없이 컴퓨터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점심 먹고 아이들은 집에 가고, 난 곧바로 전에 신청해 두었던 교육청 연수를 듣기 위해 출장을 갔다.

'내일 AS 오신다니 내일은 컴퓨터가 켜지겠지?' 하는 기대와 함께.


다음날이 되었다. 오매불망-그래 딱 이 마음이었다- 기다리던 컴퓨터 기사님은 결국 오지 않으셨다. 아침에 전화통화만 하고는 안 오셨다. 오늘은 6교시인데 국어(토의), 국어(매주 가는 도서실 수업), 체육(전담선생님 수업), 국어(토의), 수학(소수의 덧셈), 자율(교실 태블릿으로 각자 한컴타자 연습) 이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엔 '컴퓨터 없이 6교시를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으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컴퓨터가 없던 초임 시절의 내가 떠오르면서, 컴퓨터에서 자유로운 내가 기뻐하는 걸 느꼈다. 나는 컴퓨터와 상관없이 교실 칠판 앞에서 글씨를 쓰고 있었고, 아이들 사이를 누비며 교과서 기록을 확인하고 다녔다. 컴퓨터에서 무언가 영상을 보느라 쓰던 몇 분이 사라지니, 수업을 더 풍성히 하게 됐다. 더 많이 얘기하고 웃고, 아이들과 대화를 했다.


난 옆반에 가서 질문을 했다.

"선생님 오늘 체육 장소가 어디예요?"

"아 오늘 강당이에요."

"저 메신저가 오늘도 안 돼서요 동학년 연락 오는 거 있으면 카톡으로 좀 알려주세요."

"아 네~"

그리고 점심시간에 동학년 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찾아오셨다.

"선생님 메신저가 안된다고 하셔서요. 오늘 이 학습준비물 입력을 해야 하는데요 종이를 뽑아왔어요 여기에 필요하신 거 적어주세요." 미리 포스트잇에 메모해 둔 걸 조금 보완해서 쓰고는 수업 마치고 가져다 드렸다. 그 선생님의 컴퓨터에서 엑셀에 입력도 해드렸다.


아이들이 다 가고 조용해진 교실, 난 컴퓨터가 있지만 없는 상태로 내 자리에 앉았다. 아까 도서실에서 빌려온 '성공한 인생' 빨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몇 달 전인가 남편이 말했던 김동식 작가의 책이었다. '남편이 정말 창의적이라며 칭찬했던 그분의 글을 이제야 읽네.' 160여 쪽 되는 책, 11개의 에피소드가 담긴 소설집이었다. '와 정말 재밌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설렘과 기대가 가득한 이런 마음이 너무 좋았다.

책을 다 읽고도 퇴근시간까지 아직 30분이 남았다. 평소같으면 퇴근 시간 안에 간 적이 거의 없었다. 맡은 업무 해야 하고, 온라인 의무 연수 들어야 하고, 내일 수업자료 준비해야 하고, 나이스 열어서 공문 처리해야 하고... 그러다가도 일을 다 못마치고 퇴근하곤 했다. 그런데 컴퓨터가 안되니 그 모든 일이 멈춘 것이다. 이 낯선 '남은'시간에 나는 교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즉석사진을 집게에 달아 거는 마끈이 엉킨 채 튀어나와 있었다. 지난번에 급한 대로 사진을 걸 때 한번 꺼내 쓰고는 그냥 뭉쳐서 넣어두었던 그대로였다. 양이 꽤 많은데 그동안 그 엉켜 있는 걸 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고장 난 컴퓨터 덕분에 할 수 있었다. '30분이면 딱 하기 좋은 일이네.' 먼저 마끈의 끝을 찾아서 풀기 시작했다. 내 네이비색 원피스 위로 마끈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풀고 풀고 풀고.. 계속 풀다가 안되면 가위로 잘랐다. 그래서 결국 4묶음으로 만들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이 되었다. '아, 뿌듯하다.' 해야 하는데 못하던 걸 했을 때의 그 기쁨이 있었다.


컴퓨터가 있어서 학교에서도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예전엔 상장에 본문을 하나 써서 다 인쇄하고는 상장번호, 학년, 반과 아이 이름은 다 선생님들이 쓰셨다. 그래서 글씨 잘 쓰시는 분이 정말 필요했고 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컴퓨터 덕분에 누구나 멋진 상장을 뽑을 수 있고, 통지표 글씨에 대한 부담도 없어졌다. 교실에 이쁜 게시물도 쉽게 뽑을 수 있고, 선생님들 서로 더 편하게 연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컴퓨터가 없어야만 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히 있다. 옆반 선생님과 하루에 한 번도 안 만나고 퇴근하는 날도 많은데 오늘은 참 많은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어제오늘 컴퓨터를 보지 않아서 내 눈이 좀 좋아지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든다. 내일 출근하면 메신저에 얼마나 많은 메세지와 업무가 나를 기다릴지, 컴퓨터 수리비는 또 얼마나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어제와 오늘 컴퓨터가 없어도 수업은 할 수 있었고 난 더 자유로운 마음이 들었다. 컴퓨터 고장은 어제와 오늘 내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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