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05/ 용기 있게 잘했어
옛날에는 학년이 올라간 첫날이면 어김없이 자기소개를 했다. 선생님이 된 나도 그렇게 해왔다.
'첫날이니까 당연히 인사를 해야지.'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아주 불편해하는 몇 명 아이의 표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코로나 감염병 이후 유난히도 마스크를 착용한 아이가 그런 경우가 많다.
'그래, 3월 첫날 얼마나 긴장되겠어. 그런데 인사까지 시키는 건, 누군가에겐 좀 잔혹한 것도 같네.'
그래서 올해부터는 개학 다음날 자기소개를 하는 걸로 계획했다. 하지만 못 들었다는 아이들 탓에 하루 더 지나 3일째에 하게 됐다.
"오늘은 자기소개할 준비 잘해왔어요?"
"저, 선생님 보고 읽어도 되나요?"
"첫인사는 그냥 말하듯이 하면 좋겠는데~."
"아, 네. 외우긴 했어요."
"뭘 외워서 해. 편안하게 말하듯이 해요."
"존댓말로 해요?"
"임원선거 연설 할 때는 존댓말로 하고, 오늘 인사는 그냥 해요."
"오늘 자기소개는 각자 준비해 온 말을 다 하고, 마지막에는 친구들이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 안 해줬으면 좋겠는지까지 더 말해주세요."
그리고 나는 바닥에 붙이는 노오란 라인테이프를 길게 뜯는다. 그리고 반을 잘라 이어붙여서 두께가 있도록 만든다. 그리고 연필로 하트를 그린다. 그리고 가위로 자른다. 칠판 앞 정 가운데 바닥에 붙인다(오늘의 사진).
"자 여기 노란색 하트를 붙여두었어요. 이 자리를 밟거나 바로 뒤에 서서 소개하는 거예요."
이렇게 바닥에 설 자리를 표시를 해 두어야 발표하는 아이가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아무 표시가 없으면 가운데 자체를 못 찾고, 쭈뼛쭈뼛 가운데를 찾는 데만 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자, 1번이랑 25번 일어나세요. 눈 감고 가위, 바위, 보~!"
"25번이 이겼네요. 먼저 할래요? 나중에 할래요?"
"나중에 할래요."
그래서 결국 1번이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이름순서로 정해진 강 씨 남자아이, 1번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왔다.
"안녕? 내 이름은 강**라고 해. 나는 **를 좋아하고, **를 싫어해. 너희들이 나에게 **해줬으면 좋겠고, **안 했으면 좋겠어. 안녕." 아주 또박또박 말을 잘해서, 끝번호까지 이 형식대로 모두 말했다.
그리고 나도 마지막에 나가서 장난반 진심반 소개를 했다.
"안녕 난 최**라고 해. 난 프레즐과 츄러스를 좋아하고 못난이 꽈배기를 좋아해. 못난이 꽈배기 집에서 파는 핫도그도 진짜 맛있어. 난 달리기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해. 난 오감이 발달해서 너무 큰소리를 싫어하고 냄새나는 것도 싫어해. 누군가 부정적인 말하는 거 듣는 건 싫어해. 작년에는~옆반은~하고 나를 다른 선생님과 비교하는 것도 싫어해." 말하는 내내 아이들은 웃는다. "나도 거기 꽈배기 좋아하는데."이러면서~
아이들의 발표태도는 다양하다. 정말 외운 듯이 쉼 없이 말하고는 쓱 들어가 버리는 아이도 있고, 여유 있게 쉬기도 해 가며 웃어가며 말하는 아이도 있다. 손동작도 해가며 유쾌하게 발표하는 아이도 있고, 두 손을 꼼지락꼼지락 거리며 겨우겨우 발표하는 아이도 있다. 쉬는 시간 목소리는 엄청 큰데, 발표 시에는 개미소리만 한 아이도 있다. 반대로 평소엔 조용하지만 우렁차게 발표한 아이도 있다.
아이들 25명을 한꺼번에 보다가 한 명씩 보니 이제야 좀 자세히 보이고 눈에 들어온다. 이름과 이어진다.
나는 아이들 명렬표에 아이의 기호와 바람을 간단히 메모하며 들었다. 나중에 상담할 때도 참고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듣다가 찐 웃음이 나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싫어하는 건 엄잔이야."
"엄잔이 뭐야?"
"아, 엄마 잔소리."
"야 그게 엄잔이야?"
숫자로는 기록할 수 없지만 오늘 자기소개 한 아이들의 마음은 대략 이렇다.
- 가족은 좋아하지만 오빠와 동생은 싫다.
- 운동은 좋아하지만 공부는 싫다.
- 친구가 놀자고 하는 건 좋다.
- 지금 공부 시작했는데 "공부해라."라고 하는 건 정말 싫다.
- 학원 끊는다는 건 좋지만 학원 다니라는 건 싫다.
- 숙제와 벌레가 싫다.
- 친구가 욕을 하거나 나를 때리는 건 싫다.
- 할머니, 할아버지가 용돈 주시는 건 정말 좋다. -> 특히 이 말에 아이들이 다 빵 터졌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얘들아 우리 **한테 용돈 많이 받는 법 배워야겠다." "어떻게 하면 용돈 많이 받지?"
"그냥 있으면 주시던데요?"
몇 년 전에는 자기 순서에 발표를 못하겠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 다 마친 후 한 아이도 있었는데, 올해 우리 반 아이들은 그 정도로 발표가 힘든 아이는 없는 것 같다. 다행이다.
성격이 I든 E든 모두 학년이 바뀌어 자기소개하는 오늘의 아이들, 다들 용기를 낸 것 같아.
모두 잘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