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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 어디니?

자녀와의 소통이 어려운 부모들을 위하여 -2-

by 잡식공룡

* 자녀와의 대화가 어려운 부모님들을 위한 3편의 글 중 두 번째입니다. *


서른이 넘은 딸에게 엄마가 묻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뭐했어?" 우스운 일이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직장이 학교가 된 딸의 일상은 또다시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 이야기인데요. 엄마의 물음에 저는 늘 '그냥'으로 운을 뗍니다.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는 곳이니까요. "그냥, 수업하고 컴퓨터로 할 거하고 그랬지."가 끝이에요. 어쩌다 학교 과학실에서 실험하고 남은 재료끼리 화학반응을 일으켜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고, 119까지 출동을 하는 날에는 그 이야기를 해드리기도 합니다. '여보세요' 정도의 인사치레가 되어버린 저 대화가 엄마가 원하셨던 바는 아니었을 테지만, 자녀 입장에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고요.




"오늘 학교에서 뭐했니?"


부모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학교에서 뭐했어?" 가장 쉽고 평범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어쩌면 이것이 성의 없는 질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 해 본 적 있으신가요? 단지 '소통'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모는 늘 같은 질문을 던지고 어떤 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는 것은 아이 쪽이라면 말이죠.


시간표 읊기형: 국어시간에 시 배우고, 체육시간에 배구하고, 수학 시간에는 - 했어요.

사건 전달형: 민방위 훈련을 하는데, 방송 기계가 고장 나서 - 됐어요.

귀차니즘, 어쩌면 대부분의 청소년형: 별 거 안 했는데요? 그냥 어제랑 똑같았어요.


아이 들까 할만한 대답을 세 가지 정도로 추려보았습니다. 자녀의 이런 대답, 마음에 드셨나요? 아니면 아쉽기는 해도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느끼셨나요? 마음에 드는 답변을 얻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하는 것이 꽤나 중요합니다. 반복적인 일상에 대한 반복되는 질문은 좋은 질문이 되기 어려워요. 만약 그 반복적인 일상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면 다르긴 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들끼리 나누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 함께 업무를 처리하고 같은 구내식당을 가고 같은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직장 동료 간에 나누는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되지만 공감대가 충분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에 힘이 실립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궁금해하는 '내 자녀의 학교 생활'은 절대 이 영역에 들어가지 않죠.

활짝 열려있는 질문이 어떤 때는 답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의 첫걸음을 떼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10가지 음료 중 하나를 고르는 것보다 콜라, 사이다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진다고 하지요? 대답할 거리가 운동장만큼 다양한 질문을 대할 때, 아이들은 어느 곳에 발을 디뎌야 할까 주저하다 그 변두리만을 빙빙 돌고 말아요. 오히려 구체적인 질문, 좁은 범위의 질문이 말의 물꼬를 쉽게 터줄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5일, 매일의 7-8시간을 학교에 있는 나의 자녀가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진짜 '내 아이의' 말을 듣고 싶다면 질문의 범위를 좁혀보세요.



"학교에서 어떤 공간을 제일 좋아하니?"


‘공간’을 매개로 대화를 시도하는 거죠. 집 안에서 내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일까요? 집 안에서의 자녀를 늘 지켜본 분들은 아이의 성향, 평소 행동에 비추어 대충 답을 예상할 수 있을 거예요. 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친정집의 저희 엄마는 아마도 본인 방의 침대 위를 가장 좋아하실 것 같네요. 잠귀가 밝은 어머니는 조용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시간과 그 잠자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니까요. 요즘은 평생학교를 다니며 배우는 글씨를 연습하시느라 책상 겸용이 되어버린 식탁이 후발주자로 무섭게 달려들 것 같고요. TV 보는 것을 좋아하고, 낮잠 주무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기는 싫어하시는 저희 아버지는 고민할 것도 없이 TV를 마주하고 있는 거실의 소파 위가 최애 공간일 것 같아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일단 부모님이 계시는 집의 공간들, 각 공간을 이용하는 부모님의 모습들, 부모님의 취향과 같은 요소들을 하나하나 더듬어보게 되어 마치 한차례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함께한 적 없는 집 이외의 공간에서 이 분들은 어디를 가장 좋아하실까 생각을 이어보니, 쉽지 않습니다.


내 아이는 학교에서 어떤 공간을 제일 좋아할까요? 쉽지는 않지만 꼭 먼저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이 학교를 다닐 때와 공간의 명칭이나 학교 구조가 조금씩 바뀌었을 테지만, 어떤 공간이 가지는 특성 자체는 큰 변화가 없을 테니 말이에요. '우리 ㅇㅇ은/는 어떤 곳을 가장 좋아할까?' 자녀의 기질적인 특성, 이전에 들었던 학교 에피소드들의 주된 배경 등을 힌트 삼아 머릿속을 자녀로 가득 채워보세요. 부모에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자식 생각이지만, 바쁜 일들과 거친 삶 속에서 잠시 뒤로 밀려났던 내 자녀의 일상에 조금 더 집중해보는 것입니다.


실제 대화는 상상보다 더 재미있을 거예요. 아이가 좋아하는 공간이 부모의 상상과 일치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자기 교실을 좋아하는 아이, 다른 반 교실을 좋아하는 아이, 복도를 좋아하는 아이, 화장실을 좋아하는 아이, 급식실을 좋아하는 아이, 과학실을 좋아하는 아이, 도서관을 좋아하는 아이, 강당을 좋아하는 아이, 운동장을 좋아하는 아이, 학교 뒤뜰을 좋아하는 아이 심지어 교무실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학교에는 구석구석 많은 공간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든 공간이 각각의 아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아이들을 자주 만나게 되기도 하지요. 비슷한 특성의 아이들이 모여서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까요.


아이들로 가득한 학교의 전경

"난 우리 반 교실이 제일 좋아."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렇구나!" 하고 대화가 끝나면 될까요? 같은 공간을 좋아하더라도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마다 또 다릅니다. 교실을 왜 좋아하는가에 대해서 들어봐야 합니다. 사실은 그 이유들에서 아이의 향기가 더 자세하게 묻어나곤 하니까요. 교실이 좋은 이유는 새로 배정된 지금의 학급 구성원들이 좋아서 일수도 있고, 담임 선생님이 좋아서 교실까지 좋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반에 한 두 명씩 포진해있는 내가 싫어하는 친구들이 유일하게 우리 반에는 없어서 일수도 있고, 조금 단순하게는 교실의 위치가 계단 끝에 있어서 움직이는 동선이 가장 짧아서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반 교실을 좋아하는 아이는 현재 자신의 교실이 싫거나(자기 반이 싫다면 그 이유도 여러 가지 겠지요?), 자신의 반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다른 반에 자신이 정말 친한 친구가 있거나, 그 반 담임 선생님이 가장 덜 엄격하셔서 친구들과 모여 놀기에 적합한 곳이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상상하지 못하는 수천 가지의 이유가 더 있습니다.


과학실, 수학실, 영어실과 같은 특정 교과실의 경우에도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그 과목을 좋아해서 그것을 배우는 교실이 좋을 수도 있고,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좋을 수도 있고, 그 교실에서는 자유롭게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어서일 수도 있고, 그 교실이 어둡거나 책상 배치의 구조가 특이해서 몰래 잠자기에 좋아서 그곳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운동장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도 이유는 다양합니다. 단순히 공놀이(축구, 농구, 야구 등등)를 하고 싶은 아이들만 운동장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공놀이를 하는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아이에게도 운동장은 가장 눈이 가는 공간입니다. 골대 근처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 그 옆으로는 반대편 골대를 놓고 축구하는 다른 무리의 아이들, 운동장 구석을 또 나누어서 소프트볼을 던지며 노는 아이들, 그 옆으로 난 트랙을 무작정 걷는 아이들, 운동장이 다 보이는 벤치에 벌렁 앉아 있는 아이들, 그늘진 운동장 끝 스탠드에 올라앉아 있는 아이들, 모두가 자신만의 이유로 그곳에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대답하는 데 오랜 시간 주저한다면, 부모가 먼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서 분위기를 전환해 볼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생각할 시간, 혹은 어색함을 뚫고 자기 생각을 말로 뱉어낼 시간을 주는 거죠. "아빠는/엄마는 학교 다닐 때 방송실을 좋아했던 것 같아~ 방송실은 방송부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름 특권자들의 공간인데, 내가 방송부였거든."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학교에서 좋아하는 공간을 찾지 못한다면 아이에게 '학교'라는 공간이 현재 그다지 좋지 않은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가 '학교 가기 싫어!'라고 투정을 부리는 것과는 약간 다른 결에서요. 대화가 조금 더 필요한 상황이라고 판단이 되시면 대체 질문으로 "학교가 싫으면, 집에서 좋아하는 공간은 어디인지?" , "학원은 어떤지?" 등 학교 이외에 마음 붙이고 있는 공간이 있는지에 대한 대화를 통해 아이의 심리를 만져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학교에서 가장 싫은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학교는 다 싫어. 나는 공부가 하기 싫은데 교실에서는 맨날 수업만 하잖아. 난 책도 싫으니까 도서관도 싫고, 급식이 맛없어서 급식실도 싫어!"라고 신랄하게 학교를 비판한다면 오히려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장소를 특정한 이유로 싫어하고 있지는 않은가가 중요합니다.


또, 부모님이 생각하시기에 사람이 많이 없는 장소, 조용한 장소를 아이가 최애 장소로 꼽았을 때에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조금 더 세심하게 들어보세요. 평소 내향적인 성향이거나 충분히 그럴법한 이유를 든다면 괜찮습니다. 실제로 천성이 세심하고 조용한 아이들은 상상초월로 시끄러운 교실을 청각적으로 힘들어해서 점심시간이면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을 제 발로 찾아 나름의 '휴식'을 취하고 교실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가 그곳을 왜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유를 얼버무리거나 그 대화를 끝내려 한다면 그곳이 '어쩔 수 없이 도달한 곳'이 아닌지 주의 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화장실이 좋은데?"라는 말을 듣고 덜컥 겁내지 마세요. 요즘 아이들에게 커다란 거울과 미니 고데기를 꼽을 수 있는 콘센트가 있는 화장실은 자신을 꾸미는 데 최고의 공간이기도 하니까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이들이 주로 찾는 공간 자체의 특성보다 그 공간을 '왜' 찾는지 그 이유에 방점이 있습니다.


주의사항 1. 열 번 찍어 안 넘어오는 사춘기 청소년 없습니다.
"우리 ㅇㅇ은/는 학교에서 어떤 곳을 가장 좋아해?" (기대 가득)
- 그런 걸 왜 물어? (훽)
[!] 당황하지 마세요. 돌아서지 마세요. 다시 한번 물어보세요.

주의사항 2. 꼰대력 내려놓기.
"나는 운동장 벤치 좋아해!"
- 아니, 너는 도서관이나 교실이나 이런 공부하는 데 놔두고 운동장 벤치를 좋아하니? 그것도 운동장도 아니고 벤치는 또 뭐야?
[!] 잘못된 대화 한 방이면 아이 입에 몇 달간 지퍼 채울 수 있습니다. 이 대화의 목적, 소통입니다


"오늘 학교에서 뭐했어?"

오늘은, 이렇게 묻지 마세요.


©️잡식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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