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께
알콜중독 이었던 아버지가 코로나 시절 주무시다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후 엄마는 큰 충격에 빠지셨다. 니들 다 시집 장가 보내고 나서 이혼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대던 엄마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무척 슬퍼하신다. 50년 세월을 같이 산 情, 미운 정 고운 정이 한 가득이었나 보다.
갑작스런 배우자와의 사별, 늘 돌보던 대상의 부재는 엄마의 인지능력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뇌 정밀 검사를 했더니, 예상대로 알츠하이머 진단이다. 말로만 듣던, 주변에서나 일어날 일이 울 엄마에게, 나에게 닥친 것이다.
하늘이 노랗다. 가슴이 먹먹하고 당황스럽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니, 우선 데이케어 센터에 보내드리는게 급선무라 했다.
혼자 계시면 금새 악화되니 되도록 많이 움직이시고 사람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늘 혼자 계셔야 하기에 걱정이 많았는데 데이케어센터를 가시면 안심이 될 거 같아서 부랴부랴 입소 시켜드렸다. 안 가신다는걸 간신히 설득해서 보내 드린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년이 되었다. 병이 더디게 진행이 되는 거 같아서 다행이지만, 간혹 아침과 저녁을 헷갈리실땐 가슴이 무너진다. 너무 너무 속이 상하다.
큰 딸인 나는 항상 부모님 근거리에 살고 있다.
다른 동생들은 지방에, 외국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엄마를 보러 오는데, 가끔씩 만나는 엄마가 한 얘기 또 하고 자꾸 하고 그러면 너무 속이 상한가보다. 한번은 동생이 엄마한테 벌컥 화를 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끔 봐도 너무 답답하고 속이 상한데 언니는 매일 엄마 보면서 얼마나 속이 터지겠어... 이런다.
난 진짜 엄마가 자꾸 같은 말 하는데 전혀 화나지 않는다.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얼마든지 같은 말을 여러번 해도 처음들은 것처럼 대답해 줄 수 있다. 이 상태로만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얼마든지 대답해 줄게 엄마!
<계엄상황을 100번도 넘게 설명했는데 아직도 기억을 못하신다. 그래도 괜찮다. 자식들만 안 잊어버리면 된다!>
엄마는 1남 3녀중 장녀인 나를 딸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층층시하에 4남매의 고만고만한 자식들, 시누 시동생 조카들까지 늘 우리집은 사람으로 붐볐다. 어린나이에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마음고생 몸고생 하니, 그걸 풀 데가 장녀인 나밖에 없었다. 나는 자식이기 보다는 자신의 고단함을 나눠줄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난 늘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고, 엄마랑 사이좋은 아이들은 부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었다.
어린시절 뇌리에 깊이 자리잡은 기억에, 매일 아침 우리엄마는 큰 소리로 악을 쓰며 우리들을 깨웠다. 한 번에 안 일어나면 욕 폭탄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아침부터 엄마의 욕을 잔뜩 먹은 나는 항상 주눅이 든 채로 학창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욕을 먹으니 밖에서도 늘 자신감이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다짐했다. 내 아이는 사납게 깨우지 말아야지. (아이가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난 실천하고 있다. 단 한 번도 화를 내면서 아이를 깨우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연년생으로 밑에 동생이 줄줄이 있으니 난 제대로 엄마젖도 못 먹어보고 엄마 등에 업혀본 기억도 거의 없다. 엄마는 내게 늘 화만 내는 사람이었다.
딱 한번, 엄마가 업어준 기억이 나는데, 엄마의 등이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했던지, 50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느낌이 생생하다. (설마 엄마가 한번만 업어 줬을까마는 내 기억엔 엄마는 내게 너무나 차가운 사람이었다.)
난 엄마랑 둘이 있는 게 너무 싫고 너무 어색했다.
고등학생 때였나? 엄마랑 시장에 갈 일이 있었는데, 떡볶이 같이 먹자고 하던 엄마를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랑 둘이서 마주 앉아 음식을 먹는다는 건 너무나 어색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땐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그날 매몰차게 거절했던 내 마음상태가 가끔씩 떠오르면 엄마한테 많이 미안하다.
그치만, 어쩌겠나. 엄마잘못도 내 잘못도 아닌 것을...
내 엄마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늘 내가 보살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근데, 엄마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기고 나니, 오히려 내가 엄마를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동안도 내가 엄마를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다.
엊그제 엄마를 보러 갔더니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뭔가를 보고 계신다.
아빠가 있는 액자를 들고 하염없이 보고 계신다.
황반변성이 심해서 사물을 또렷히 볼 수 없는 상황인데도 엄만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쓰다듬는다. 아빠가 보고 싶으신가 보다.
엄마의 등을 바라보면서, 아빠도 없는데 엄마마저 안계시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늘 나는 엄마의 보호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역시 내 보호자는 엄마였다.
그걸 깨닫는데 50년이 넘게 걸리다니.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줄줄 흐른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건 상상 만으로도 너무너무 슬프다. 너무나 흔한 말이지만,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지 돌아가신 다음 후회하면 뭐하나.
이번 주엔 중국에 사는 셋째동생이 귀국한다.
딸 셋과 엄마가 1박2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시는 엄마를 강제로라도 모시고 가기로 했다.
엄마 힘들지 않게 가까운 온천에 가서 재밌는 시간 만들어 봐야지.
걸을 수 있을 때 한번이라도 더 모시고 가야겠단 생각이다. 어린 시절 엄마랑 단둘이 떡볶이는 못 먹었지만, 이제라도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게 지내보려고 한다.
엄마.
내 엄마.
사랑해 엄마.
- 머릿속에 지우개를 갖고 사시는 이 세상 모든 엄마들의 건강을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