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가 준 선물
브런치에서 글을 쓰라는 압력(?)의 알림을 받고서도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지막 글을 쓴 지 벌써 한 달이나 되었다.
그사이 중국에 있는 동생이 왔고, 아들 같은 조카는 훈련소에서 폐렴으로 입원했다.
사무실 앞 이면도로에서는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와 가벼운 접촉사고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내 짝꿍은 대선 캠프 유세단장이 되었고(물론 내란당은 아니다), 악기사에서 악기 교재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도 있었다. 정말 정신없는 한 달이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었지만, 매일 예상치 못한 일들이 터지니 불안한 가슴과 복잡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힘들었다. 그중 제일 컸던 건 역시 교통사고였다.
우리 사무실은 그 유명한 서부지방법원 뒤쪽에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항상 시속 10km도 안 되게 천천히 운전한다. 요즘은 핸드폰 보면서 걷는 사람들이 많아서 길 한가운데로 걸어갈 땐 빵빵거리지도 못하고 그냥 뒤따라갈 때가 많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오래전부터 잡혀 있던 점심 약속이 있었다. 평소처럼 슬슬 운전하고 가는데,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근처 사무실 사람들이 다 나와서 거리가 북적거렸다.
일방통행 골목길을 서서히 빠져나가려는데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길래 더욱 속도를 줄였다.
다 지나가고 다시 출발하려는 순간, 뭔가 휙 지나갔다. 뭐가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이었다.
그러더니 쿵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차 문 열고 뛰쳐나갔다.
헬멧을 대충 쓴 할아버지가 내 차 옆을 스치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헬멧이 벗겨지면서 얼굴에서 피가 났다. 정신 잃고 쓰러진 할아버지 가슴에 손을 얹고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119와 경찰에 신고하는 동안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현장은 완전 아수라장이 되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움직이면 안 된다고 붙잡았는데도 뿌리치고 일어나 앉으시더니 계속 움직이려고 하셨다.
곧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과 경찰이 말려도 소용없었다. 나는 너무 정신없고 손이 떨려서 근처에 있던 직원 불러 보험사에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경찰이랑 구급대원들이 간단하게 조사하고 응급처치하고, 보험사 직원도 와서 현장 정리하는데, 문제는 그 할아버지가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도 굳이 구급차를 안 타겠다는 것이다.
아무 말도 안하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시니, 가족들이 와서 설득해도 안 된다.
거의 한 시간을 길에서 실랑이하다가 결국 구급대원들은 서명받고 철수했다.
나는 경찰서 가서 간단하게 조서 쓰고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해 보니 정말 거의 동시에 큰길로 진입히려다 순식간에 사고가 난것이다.
경찰은 차선 없는 좁은 길이라 법규 위반은 아니지만, 좁은 길에서 큰길로 나가는 차가 조금 더 책임이 있다고 한다.
법규 위반이 아니라 과태료 같은 건 없고 그냥 보험 처리하면 된다고 해서 간단하게 끝났다.
나중에 들어보니 보험사 직원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다시 119 불러 병원에 모셨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 다치게 한 건 처음이라 며칠 밤낮을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끙끙 앓았다.
며칠 뒤 보험사 담당 직원한테 연락이 왔는데, 할아버지가 다친 다음에 움직이시는 바람에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서 구멍이 났다고 한다.
아ㅜㅜ
처음엔 제발 크게 안 다치셨기를 바라면서 엄청 걱정했는데, 움직이다가 더 크게 다치셨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가만히 누워 있다가 바로 병원에 가셨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내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느꼈다.
두려움, 짜증, 화, 무기력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밀려와서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특히 돈 문제도 신경 쓰였다. '사람이 다쳤는데 돈이 대수냐' 싶다가도, '당장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어쩌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라는 사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전에도 '나'에 대해 고민하고 깨달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나'라는 사람이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는(특히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고 판단하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나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게 어쩌면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며칠 동안 가슴이 답답하고 두근거렸다.
예전엔 이런 증상이 있을때마다 청심환이나 안심액 같은 약을 사 먹곤 했는데, 가만히 느껴보니까 내가 숨을 제대로 안 쉬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상태를 살펴보니,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살고 있었다.
오십 평생 처음 알았다. 내가 제대로 숨을 안쉬고, 가슴으로 헐떡거리면서 살고 있었다는 걸.
숨조차 편하게 제대로 쉬지 않고 살았으니 늘 머리가 멍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궁금해하고, 아프지 않게 미리 영양제 챙겨주고, 그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그에게 도움이 되고 그가 좋아하는 모든걸 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그런데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세심하게 살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알았던 '나'에 대한 자각은 그냥 껍데기만 보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던 착각이었다.
정작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솜이가 갑자기 떠난 이후로,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삶에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니, 많은 상처와 불편한 감정들이 '나'를 온전히 인식하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현실을 인정하는 것. 이게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인정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매 순간 깨어 있으라,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는 흔한 말들이 내 삶에 거의 적용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이것 또한 연습하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될 수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요즘은 '나'를 알아가는 재미를 조금씩 느끼는 중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인생의 절반을 살았으니, 남은 인생은 진짜 '나'로 살아봐야겠다.
세상엔 이유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더니, 큰 깨달음을 주기위해 모든 일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오늘도
감사합니다.를 외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