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켜라!
한동안 브런치 스토리 이웃 작가님들의 새 글이 올라와도 잘 읽혀지지 않고, 글을 쓸 마음의 여유도 없을 만큼 메마른 삶을 살고 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갱년기 증후군일수도 있고, 마음이 확 달아올랐다가 급격히 식어버리는 내 성격 탓 일수도 있겠다.
모든 것이 시큰둥하고 의욕이 없는, 그 상태를 인지하면서 이러면 안 되지 하는데도 의욕이 안 생기는 나날이다. 날씨 탓인가.
암튼 머릿속이 정리가 잘 안 되고 집중도 안 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글을 써보라는, 내 글을 기다리겠다는 어느 작가님의 댓글에 정신이 번쩍 난다. 글을 안 쓰고 있는데도 드문드문 구독자가 생겼다는 알림이 뜨면 부담도 확 생기고...
나중에 읽어보면 일기장에나 쓸 만한 부끄러운 글들을 읽어주시고 따뜻한 댓글 나눠주시는 이웃 작가님들의 정성에 다시 노트북을 켜본다.
연로한 부모님을 두신 많은 가정에서 비슷하게 겪는 일이 아닐까 싶어 최근 일어났던 일을 공유하고자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울 엄마는 3년째 크게 나빠지지 않으시고 그냥저냥 잘 유지하고 계신다.
조금이라도 이상행동을 하시면 화들짝 놀라 예민하게 관찰하고 가급적 혼자 계시는 시간을 줄여드리려 나름 노력도 하고 있다.
1남 3녀인 우리 형제는 외국에 살고 지방에 사는 터라 자주 만나기 힘들다.
그나마 이천에 살던 막내가 부모님 곁으로 이사 와서는 일요일 마다 엄마 약 챙겨드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
형제가 없는 집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부모님과 나의 거리가 3키로 넘은 적이 없으니, 때론 왜 나만!!! 이러다가도
요즘은 내가 원 없이 부모님을 제일 많이 만나는 복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면 그 수고로움 마저 감사하다.
지난 주 월요일,
엄마는 아침 9시반 쯤엔 어기없이 데이케어 센터 버스를 타신다.
늘상 있는 루틴이므로 그 시간엔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
근데, 오전 10시쯤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집 열쇠를 잃어버리셨다며 센터 차량을 못 타신 거다.
얼른 집에 전화해 보니 어제 외출했다가 돌아오면서 가방에 열쇠를 두고는 그 사실을 잊어버려 온 집안을 뒤지고 계셨다. 가방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센터에 모셔다 드린다고 하니 목소리가 영 기운이 없으시다.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얼른 집에 가봤더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금 물속에서 나온 것 마냥 땀으로 푹 젖은 채 마루에 미동도 없이 누워계셨다.
그날이 최고 더웠던 날, 집의 온도가 33도였는데 에어컨도 못 켠 채로 1시간여를 열쇠를 찾아 헤매신 거다.
얼른 에어컨을 키고 시원한 우유 드리고, 옷을 전부 갈아 입혀 드렸다.
옷이 흠뻑 젖도록 집안을 헤매신... 목이 메인다.
집에 안 와봤으면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다.
엄만 전기세가 많이 나올까봐 에어컨도 못트신다.
오히려 켜놔야 전기세 안나온다 해도 오랜 습관이 들어 늘 꺼놓고 계신다.
날씨가 왠만 해야 말이지. 이 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 한증막같이 해놓고 땀 흘리고 계시니 미칠지경이다.
이 사실을 동생들과의 톡방에 공유를 했다.
장녀로서 다들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후 계속 37도가 넘어서는 더위가 계속되는 바람에 일하다 말고 엄마집에 뛰어가서 에어컨을 켜놓고 왔다.
며칠 뒤 동생이 찾아낸 방법.
요즘 전자기기는 원격으로 조정이 된다며, 한번 해보라고 한다.
오~ 신기방기. 된다 된다!!!
휴대폰으로 연결했더니 원격으로 조정할 수가 있다.
게다가 형제들이 다 같이 할 수도 있다.
수시로 엄마네 에어컨을 서로서로(?) 감시하고 아예 끄지 못하게 리모컨을 감춰두었다.
아주 약하게 틀어놔도 춥다 하셔서 긴 옷도 사다드렸다.
며칠 전엔 에어컨을 분명히 켜두었는데 꺼져있길래 엄마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니 본체에 붙어있는 전원버튼을 어떻게 찾아내셨는지 (전원버튼 찾기가 어렵던데) 추워서 끄셨다고 한다.
끄면 큰일난다고 겁을 주고는 다시 약하게 켜둔다.
얇은 긴옷들도 사다드렸는데 아낀다고 안 입으시고 다 떨어진 옷만 입으신다.
잔소리 하면 그뿐.
엄만 익숙한게 좋으신가보다.
그래요. 엄마.
그냥 엄마 하고 싶은 대로 하셔. 내가 왠만하면 다 맞춰줄게
알콜 중독 아빠 보살피며 무던히도 속 썩었던 엄만데 내가 얼마든지 해줄게.
그냥 지금처럼, 지금만큼만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
어렸을 때 살가운 모녀사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살가운 모녀 해봅시다.
새로 사드린 옷들 아끼지 말고 어서어서 꺼내 입으세요~
사랑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