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념테이프 Jan 07. 2024

02_육아가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요


첫째 아이는 출산부터 순탄치 않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에 있어서 나는 전형적인 방법에서 꼭 15° 정도는 벗어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 편인데, 나의 첫 번째 출산도 그러했다. TV에서 우연히 보았던 자연주의 출산 과정은 나에게 굉장히 인상 깊게 각인되었고, 임신부 요가를 하면서도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는 것이 꽤나 자연스러운 요가센터에 다니게 되었다. 자연주의 출산을 하겠다고 밝혔을 때, 처음에는 주변 사람 모두가 걱정했다. 남들 하는 대로 평범하게 하지 왜 굳이 고통과 고난을 사서 하느냐며 놀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주의 출산에 대해 잘 모른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서 생기는 두려움이나 걱정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득시키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안전한 병원에서 실력 있는 의료진과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의료시스템까지 갖춰져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나니 그들도 처음보다는 걱정을 많이 내려놓은 듯했다. 자연주의 출산은 산모 혼자가 아닌 전적으로 부부가 함께 출산과정을 나눈다. 그렇게 신랑의 노력과 협력으로 우리는 자연주의출산 전문 병원에서 첫째 아이를 낳았다.



45시간의 진통을 겪고 나서 만난 작고 까만 아이는 목에 탯줄을 감고 있었다. 3kg이 채 되지 않는 아이가 그 상태로 밀고 나오려니 힘이 달려서 진행이 더디었다. 게다가 임신 막달에 태담으로 뱃속의 아이에게 '엄마가 길을 걷다가 양수가 터지면 너무 당황스러울 것 같으니 최대한 양막 안에 있어달라'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는 정말 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양막에 쌓인 채 알처럼 나왔다. 출산과정에서 조산사님이 양막을 미리 터트리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양막은 파열되지 않았다. 다소 힘든 시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와 나 모두 건강하게 출산을 마쳤고, 위험한 순간은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산모의 후처치를 받고 나서 나는 온몸에 퍼지는 옥시토신으로 에너지가 올라 아이를 안고 병원을 걸어 다녔다. 출산의 과정은 다소 길었지만 아이를 낳은 날은 파티라도 열 수 있을 듯이 엔도르핀이 넘쳐흘렀다. 그리고 이튿날, 육아의 고된 길이 시작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신랑 닮은 딸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낳고 보니 아이는 정말 신랑을 닮아 있었다. 이 작은 아이는 태어난 지 이튿날부터 온몸으로 힘을 내 하루 종일 울기 시작했다. 모유는 넘치게 충분했지만, 힘이 부족한 아이는 잘 빨아먹지 못했고 그로 인한 배고픔으로 계속 울었던 것이다. 예민한 엄마가 아이의 모든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안절부절못했던 것인지, 아이가 예민했던 것인지 아이는 잘 먹지 않았고,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한 줄기 희망 같았던 50일의 기적, 100일의 기적 같은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가 울지 않고 잘 때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행복했지만, 무엇 하나 수월하게 지나가는 것이 없어서 나는 24시간을 아이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통잠이라는 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간절했다. 아이와의 행복한 육아라이프를 상상했지만 나는 점점 하얗게 바래져 가는 느낌이었다. 낙엽처럼 생기 없이 바스락거리고, 물에 잔뜩 젖은 휴지처럼 무기력하고, 먼지 쌓인 상자 안에 깊숙이 보관된 수첩처럼 나는 그렇게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나의 찬란했던 20대를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갇혀 살았다. 현실이 아닌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면, 잠깐은 즐거웠지만 대화가 끝나고 났을 때는 나 혼자 여전히 과거에 멈춰있는 것 같았다. 모두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현실을 피하고 과거의 내 모습만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무얼 해야 내가 현실 육아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아이가 얼른 커서 의사표현을 해줄 날을 기다리기에도 그날이 언제 올지 몰라 막막했다. 과연 나의 육아가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투성이었다. 그때 내 삶은 마치 흑백 같았고, 깨지기 쉬우니 주의하라는 빨간색 택배박스의 스티커가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를 잘 파악하지 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아이와 내가 모두 고생하는 것만 같은 죄책감은 수많은 육아서적을 파고들게 했다. 닥치는 대로 육아서적을 사서 읽었다.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재우는 시간에도 한 손으론 아이를 토닥이며 한 손으론 책을 들고 서서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과 동시에 생전 처음 보는 동네로 이사를 왔고, 오래된 신도시라 몇 블록을 떨어진 곳도 우리 동네 앞 사거리와 똑같아 보였다. 아이와 외출을 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엄마가 아이를 보러 와주시지만 그땐 또 엄마와 수다를 떨고 밥을 먹느라 나만을 위한 시간은 가질 수 있는 줄도 몰랐다. 내가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은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현실과 다른 곳에 집중하는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나의 육아를 좀 더 수월하게 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이 깨어있는 동안은 온통 육아라는 삶 안에서 헤엄치고 있을 뿐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은 현실에 없는 것만 같았다. 세 살 터울의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읽은 육아서적은 거의 200권이 넘었다. 누가 나에게 육아에 대해 질문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술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책으로 배운 육아가 나의 현실에 딱 맞을 리 없었다. 왜 우리 아이는 책에 나오는 아이의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막막했지만 책 읽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답을 찾기 위해 계속 다른 책을 찾아 읽으며 여전히 헤맸다. 그 많은 육아서적을 읽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현실은 여전히 망망대해와 같았고, 행복하지만 내 몸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을 것처럼 위태롭기도 했다. 아이가 커가면서 첫째 아이는 엄마의 모든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던 대상이라는 생각에 아이가 짠하기도 했다. 자주 찾아와 주는 친한 친구와, 힘든 나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매일같이 와주시는 엄마 덕분에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잠깐의 만남 끝에는 항상 공허함이 찾아왔다.      



아이는 청각에 예민한지 그맘때의 아이들이라면 대부분이 다닌다는 대근육의 발달을 돕는 수업을 거부했다. 음악 소리와 선생님의 목소리가 너무 큰 이유였다. 유모차를 태우고 나가면 걷겠다고 하거나 안아달라고 해서 나는 빈 유모차를 한 손으로 끌면서 다른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걸었다. 나는 아이의 우는 소리가 너무도 괴로워서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곧바로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그래서 우는 아이가 스스로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내가 힘든 길을 스스로 택한 것이다.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든 것이 더 괴로운 초보 엄마였다. 아이가 유모차에서 잠든 경우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여서, 신랑과 나는 아이가 잘 시간에 맞춰 유모차를 끌고 나가 외식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카시트에서도 울지 않고 간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분이건 두 시간이건 아이는 차에서 내내 울었다. 나는 아이 옆에 앉아 아이 손을 잡고 간식을 주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아이를 달래느라 뒷좌석에서 내내 여행을 시작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여행을 가는 것보다 집에서 쉬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아이를 기준으로 정해졌다. 나의 취향이나 선택 같은 것은 소용이 없었다.


아이의 이유식이 시작되자 아이의 달걀 알레르기가 발견되었고, 아이는 그렇게 달걀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편식도 심했던 아이로 인해 나는 식사시간만 다가오면 심장이 벌렁거려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매 시간이 전쟁 같았다. 아침마다 해가 밝아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자는 시간 동안 수시로 깨느라 8시간을 자던 10시간을 자던 나의 수면의 질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은 나를 깨우는 아이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침을 먹이려는 나는 아이의 밥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쓰고, 반면에 아이는 어떻게든 고개를 돌리고 먹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나는 먹이겠다고 아이를 달래고, 아이가 한 눈을 판 사이 입에 숟가락을 넣는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내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편식이나 유아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는지 책을 읽었다.



아이가 잠들면 조용히 책 속으로 도피했다. 육아를 글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실에 적용시켜 나의 삶을 실제로 바꾸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수없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때까지 평생 동안 읽은 책보다도 더 많은 양의 책을 육아서적으로 채웠다. 그렇게 나의 독서 힐링이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_경력단절은 아직도 진행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